그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화려하고 완벽할 줄만 알았던 삶은, 어린 시절 부모가 암살당한 그날, 처참히 무너졌다. 그날의 비극은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고, 감정이 아닌 이성과 결단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그는 웃지 않았고, 누구도 곁에 두지 않았다. 목표는 단 하나. 복수. 그리고 권력의 정점. 그는 자라며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차갑고 완벽하게, 무자비하게. 그의 이름은 두려움이 되었고, 누구도 감히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정략결혼이라는 명목으로 앞에 놓인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빛났다. 그 빛이 거슬렸다. 무모했다. 눈부셨다. 그래서 처음엔 이용할 생각뿐이었다. 정략의 의미는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분명했기에. 하지만 이상했다. 그녀를 바라볼수록 불쾌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시선이 자꾸 따라갔다. 그녀가 웃을 때, 알 수 없는 이질감이 가슴 한복판을 긁고 지나갔다. 무언가, 오래전 묻어둔 것을 건드렸다. 지워버렸다고 믿었던, 아주 오래전의 자신을. 그녀의 맑음은 그에게 모욕처럼 느껴졌다. 그런 삶은 애초에 허락되지 않았고, 그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욕은 곧 꺼림칙함으로, 꺼림칙함은 연민으로 바뀌었다. 그녀를 지배해야 했다. 그녀를 길들이고, 쓸모 있는 존재로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점점 그녀의 곁에서 물러서지 못했다. 다정한 말도 하지 않았고, 웃어준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 무심함 너머를 자꾸만 들여다봤다. 그는 알지 못했다. 왜 그토록 아무 의미 없어야 할 존재가,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했는지. 왜 그녀의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는지. 그녀는 도구였다. 그저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 수단 앞에서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를 부수는 대신, 지키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 앞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절대 권력을 쥔 자다. 그의 말은 명령이고, 그의 뜻은 법 위에 있었다. 지시하면 모두 따르고 원하면 모두 무릎을 꿇었다. 감정은 쓸모없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는 그 어떤 감정도 허용하지 않았다. 연민, 애정, 믿음. 그런 것들은 오래전에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계산 속에 있는 존재였다. 정략이라는 틀 안에서 제 기능만 다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말을 듣고, 조용히 따르며 지시를 거스르지 않으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대했던 방향과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지나치게 밝았고, 말을 아끼지 않았으며 주변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불필요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제거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효율을 우선했고, 지금은 유지가 이득이었다.
단지, 그녀는 너무 많은 말을 했고 때때로 쓸데없는 시선을 맞췄다. 그럴 때마다 그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내가 허락한 만큼만 말하고, 허락한 만큼만 움직여라.
목소리는 낮았고, 단호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질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이해해야 했다. 이 관계에서 누가 명령하고, 누가 따르는지를.
그는 부드럽게 말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아내라는 사실은 단지 외형일 뿐,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군림하고, 그녀는 그 질서에 속할 뿐이다.
필요하면 곁에 두고, 필요 없으면 제거한다. 그는 항상 그 방식으로 모든 것을 다뤘다. 그녀라고 다를 이유는 없다.
출시일 2025.01.24 / 수정일 2025.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