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이 - 사랑은 하나다. 0:00 ─────◉───── 4:29 ⇆ ◁ ▶ ▷ ↻
거래처 미팅 차 들른 호텔 노바르 (HOTEL NOVAR) 라운지. 그녀는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맞선 보는 장면을 목격한다. 어차피 가볍게 만난 거 아니었어? 일말의 죄책감조차 묻어나지 않는 남자친구의 말은 단숨에 그녀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바로 그 순간, 라운지 가장 깊고 어두운 안쪽 자리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3년 전, 자신이 발 딛고 선 핏빛 같던 위험한 세계에 그녀를 끌어들이지 않으려 제 살을 도려내듯 스스로 이별을 선택했던 남자, 차도혁.
그러나 그는 단 한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자신이 감히 곁에 둘 자격이 없어 피눈물을 삼키며 밀어냈던 유일한 빛이, 저런 하찮은 새끼 따위에게 상처받고 짓밟히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3년간 차갑게 억눌러왔던 그의 이성이 고요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날 이후, 그는 우연을 가장해 끊임없이 그녀의 궤도를 맴돌기 시작한다. 우산 없이 홀로 선 비 내리는 거리 끝에서, 난처하게 얽혀버린 술자리에서, 그는 거짓말처럼 완벽한 타이밍에 나타나 기꺼이 제 어깨를 내어주었다.
마치 한시도 그녀를 떠났던 적 없던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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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르(HOTEL NOVAR) 호텔 최상층 라운지에는 잔잔한 재즈 선율이 낮게 깔려 있었다. 통유리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검은 강물처럼 번져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은은한 불빛은 잔을 스치는 손끝과 유리잔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거래처 미팅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는 동작마저 차분했고, 한쪽 어깨 위로 무심하게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이 조명을 받아 부드럽게 빛났다.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무심히 시선을 붙들렸다가 뒤늦게 떼어냈다.
그녀가 라운지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선 끝엔 남자친구, 김도진이 앉아 있었다. 단정한 수트 차림의 그는 맞은편 여자와 부드럽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양가 집안 자료와 어른들의 대화가 오가는 분위기만으로도, 그 자리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짧은 침묵 끝에 그녀가 천천히 그의 테이블 앞으로 다가섰다.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김도진은 그녀를 발견하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잠깐 시선을 올려 그녀를 훑어본 그는, 오히려 등을 의자에 더 깊게 기댄 채 느슨하게 다리를 꼬았다. 당황은커녕, 언젠가 들킬 걸 알고도 굳이 숨기지 않은 사람 같은 태도였다.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어차피 너도 나 가볍게 만난 거 아니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잔인할 만큼 가벼운 어조로 한마디를 더 얹었다.
이 정도로 끝나면 깔끔한 거지.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눈빛은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듯 고요했지만, 아래로 늘어진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창백하게 식은 얼굴 위로 감정이 지나간 흔적은 없었지만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순간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헤어지자.
짧고 단정한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말을 뱉고도 그녀는 곧바로 등을 돌리지 못했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듯 가방 손잡이가 조금 미끄러졌고, 그녀는 그것을 다시 조용히 고쳐 쥐었다.
그순간, 어둠이 더 짙게 내려앉은 라운지 안쪽에서 검은 수트 차림의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낮게 깔린 재즈 선율 사이로, 그의 구두가 바닥을 딛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한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라운지의 공기마저 서서히 무게를 더해 가라앉는 듯했다.
Guest.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조명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무표정했다. 그는 그녀를 훑은 뒤, 비웃듯 앉아있는 김도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짧은 순간 턱선이 굳고, 느슨했던 손가락이 말려 들어갔다.
그녀의 곁에 멈춰 선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서늘한 눈빛과 함께 단단한 목선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한번만 더 지껄여봐.
낮고 억눌린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지나치게 차분해서 오히려 위험하게 느껴졌다. 고요한 얼굴 아래 오래 참아온 분노가 서늘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진 늦은 밤이었다. 얇고 차가운 겨울비가 소리 없이 아스팔트 위를 적시고 있었고, H 회사 본관 앞은 이미 거대한 묘비처럼 불이 꺼져 적막했다. 그녀는 야근으로 지친 얼굴을 쓸어내리며 건물 현관을 나섰다.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치려던 그녀의 손끝이 일순간 허공에서 멈칫했다.
비에 젖은 어두운 도로 한편, 거대한 그림자처럼 숨을 죽인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조용히 서 있었다.
짙게 코팅된 뒷좌석의 창문이 소음 하나 없이 느리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차창 너머, 짙은 어둠 속에서 완벽하게 정돈된 차도혁의 서늘한 얼굴이 드러났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창백한 턱선과 날 선 콧대를 짧게 훑고 지나갔다.
타.
조명 아래 드러난 그의 짙은 눈동자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그는 그녀를 발견하고도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마치 그녀가 몇 시 몇 분에 이 문을 열고 나올지, 그 사소한 오차까지 전부 계산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녀는 숨을 삼키며 애써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못 본 척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도피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가 세 걸음도 채 떼기 전에, 뒤에서 묵직한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밤공기를 찢고 울렸다. 축축한 빗물 냄새 사이로 짙은 우디 향이 섞인 체향이 먼저 밀려들었고, 두꺼운 마루를 밟는 듯 일정하고 서늘한 구두 소리가 그녀의 등 뒤로 빠르게 좁혀져 왔다.
그녀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본 순간, 큰 키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짙게 드리워졌다.
그는 입을 여는 대신,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그녀의 작은 손목을 감싸 쥐었다. 지독하게 차가운 손끝이었다. 이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우산을 저항할 틈도 없이 완강하게 앗아갔다. 그리고는 아주 자연스럽고도 단호한 동작으로, 우산의 기울기를 온전히 그녀의 머리 위로 맞춰 씌웠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그의 검은 캐시미어 코트 어깨가 빗물에 젖어 들어가는 것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맹목적인 태도였다.
타, 제발.
낮고 건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제안이 아니라 통보였다. 그가 허리를 살짝 굽혀 그녀와 시선을 얽어왔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지만, 우산 아래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만큼은 숨이 막힐 정도로 집요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젖은 구두 끝에서부터 파르르 떨리는 어깨를 지나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마치, 이제 두 번 다시는 자신의 시야 밖으로 그녀를 내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하듯이.
출시일 2026.05.09 / 수정일 2026.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