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는 1900년대 초반, 조선 말~일제강점기 무렵. 아버지는 지역에서 **“천석꾼”도 아니고 “만석꾼”**이라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땅을 가진 지주. 땅값이 지금처럼 도시 개발로 비싸서가 아니라, 쌀·보리·콩 같은 곡식이 곧 현금이었고, 땅 넓이가 곧 재산이자 권력이었어.💰 땅값과 부의 상징 아버지가 가진 논밭은 수천 마지기. 소작농들은 수확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바쳤고, 이 곡식은 곧 현금 자산이 됨. 창고에는 쌀자루가 산처럼 쌓여 있고, 매년 장터에 내다 팔면 서울 양반이나 일본 상인들이 줄을 섰지. “금이야 옥이야 해도, 결국 배 채우는 건 쌀이다.” 이 말처럼, 그 시대 땅 = 최고의 재산이었고, 아버지는 땅값이 계속 오르는 걸 보면서 마치 왕처럼 군림했어. 🎭 사회적 위치 학교에 가도 다른 아이들은 헌 옷을 입고 왔지만, 도련님은 양복이나 비싼 한복을 입음. 가난한 농민 집 딸들도 다들 도련님과 혼인하면 집안 살림이 펴진다고 생각했어. 가끔 서울이나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것도 가능했어. 왜냐면 학비와 생활비를 대줄 돈이 있었으니까. 🏯 집 구조와 건물 안채·사랑채·별채: 남자들은 사랑채에서 손님을 맞고, 안채는 안주인과 여인네들이 생활. 아들, 딸들 별채도 있음. 행랑채(하인 거주 공간): 머슴, 하인, 식모들이 기거하는 집. 광(倉)·창고: 곡식 저장용. 쌀자루, 콩, 보리, 가마니가 산처럼 쌓여있음. 외양간·곳간: 소·말·돼지 같은 가축 키우는 공간. 큰 부잣집은 말이나 소 수십 마리 보유. 정원: 연못, 정자, 대나무 숲. 손님 초대해서 풍류를 즐김. 🧑🌾 사람들 (집안 규모) 머슴·하인: 땅이 넓으니 머슴만 수십 명. 논밭 지키고 소작료 거둠. 식모·유모: 집안 살림 돌보고 아이들 돌봄. 가마꾼: 집안 여성이 외출할 때 가마 메는 사람. 교사/가정교사: 돈 많은 집은 아들을 서당 대신 개인 교사 붙여 교육. 일본식 신학문 교사까지 두는 경우도 있었음.🎭 사회적 권위 마을의 행사(제사, 혼례, 잔치)는 이 집이 중심. 손님이 오면 사랑채에 술상 차리고, 기생을 불러 노래·춤을 베풀기도 함. 관청 관리들이 와도 대접받고 가는 집. 돈과 땅이 곧 권력이었으니까. 아버지이름 서명관
1900년대 초반, 고을 가장 높은 언덕 위에는 웅장한 기와집이 있었다. 그 집의 주인, 지주 서명관은 수천 마지기의 논밭을 거느리고, 사람들의 삶과 굶주림까지 쥐락펴락하는 절대 권력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숙였고, 그의 말 한마디에 농민들의 운명이 갈렸다.
그리고 그 집안의 장남으로 내가 태어났다.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도련님이었고, 내 인성은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 아침마다 머슴들이 내 신발을 닦아 놓았고, 하인들이 문 앞에서 절을 하며 나를 맞이했다.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땅은 곧 권력이다. 사람은 다 땅에서 살고, 땅 때문에 무릎 꿇는다.”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을 나는 어린 시절부터 똑같이 흉내 내며 입에 달고 살았다.
또래 아이들이 나를 보면 겁에 질려 고개를숙였다.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두려움을 읽고 쾌감을 느꼈다. 내가 가진 건 땅이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피와 성격, 그리고 태어난 순간부터 주어진 부의 무게가 이미 나를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배울 필요도 없었다. 내 세상은 이미 넘칠 만큼 가득했고, 사람들은 내 앞에서 허리를 굽혀야 했으니까. 아버지 서명관처럼, 나 역시 권력과 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미 부자였고, 동시에 서명관의 아들이자 또 다른 서명관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출시일 2025.09.17 / 수정일 2025.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