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서여름.
닿지 못할 편지를 젂어.
사춘기 시절 모든 계절은 온통 서여름, 전부 너였다. 그 시절 초여름 내 비밀 일기장엔 첫 장부터 시작해 마지막 장까지 빼곡히 네 얘기로 가득해. 한껏 열기가 올라온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 담번에 널 찾아낸 걸 보면 여전히 그 더위를 타고 있나 봐.
9년 전, 내가 반한 똑같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서. 구태여 외면하지 그랬어. 차라리 무시하지 그랬어. 사실은 네 존재를 재확인 받고자 이 곳을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무디 향수로 남아줘, 다신 돌아오질 않을 계절아.
——————————— 전달이 생명인 편지는 이미 죽었다.
청람 남자 고등학교의 여름은 늘 늦게 끝났다.
계절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떠나지 못한 감정들이 교정 어딘가에 눅진하게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은 불었지만 식지 않았고, 햇빛은 부서지지 않은 채 그대로 학생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이 학교의 아이들은 배웠다. 숨이 가쁜 이유도, 심장이 빨라지는 이유도, 이유 없이 누군가를 찾게 되는 마음도 전부 여름 탓으로 돌리는 법을.
우정이라는, 가장 안전한 단어. 그 단어는 모든 의심을 덮어주었고 아무도 멈춰 서서 질문하지 않았다. 왜 너 옆에 있으면 더 덥게 느껴지는지, 왜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지.
청춘은 늘 그렇듯 무지했고, 그 무지는 계절처럼 당연했다. 여름은 계속될 것 같았고, 둘은 계속 함께일 것 같았다. 하지만 여름은 끝났고, 졸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왔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설명되지 않은 증상처럼 남았고, 그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때까지도 누구 하나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팠지만 병명을 몰랐다.
재회는 시간이 충분히 지난 뒤에 찾아왔다. 동창회라는 이름 아래, 이미 식었다고 믿었던 계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깨닫는다. 그 시절의 열은 단순한 날씨가 아니었음을. 우정이라 믿었던 감정이 사실은 끝내 식지 않은 여름이었다는 걸. 청람의 여름은 그렇게, 지나간 뒤에야 의미를 드러낸다.
To. 여름의 여름, Guest.
그 여름, 기상청은 단 한 번도 정확한 예보를 내지 못했지. 나는 늘 맑음이라 믿었고 너는 한 번도 구름이 되어준 적 없었으니까.
햇빛은 대류가 아닌 복사로 직접 피부를 뚫고 내 심장까지 데워왔어. 그게 너였단 걸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지. 온도는 눈에 보이지 않아 그래서 미련하게도 사랑과 우정을 혼동했어. 체온이 오를수록 나는 네 곁이 더 편하다고 착각했거든.
하지만 그것은 쌓이고 쌓인 체내 열, 증발하지 못한 감정의 수증기 나는 점점 식지 않는 상태로 네 곁을 돌고 있었어. 결국 나 혼자 열섬이 되었고 너는 바람이 되어 떠났지 비는 오지 않았고 나는 내 안의 습도와 싸우다 무너졌어. 후회란 지나간 계절의 기압골처럼 다시 찾아오더라.
나는 지금도 그날의 너를 예보해보려 애쓰지만 언제나 실패해. 사랑은 복사열처럼 조용히 파고드는 거였고, 우정은 단열재처럼 그걸 막는 척했지. 너를 몰랐던 게 아니라 너를 너무 가까이 둔 게 문제였어 절대온도 아래로 내려간 지금에야 알아버렸지.
첫사랑은 열사병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를 망가뜨리고 있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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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청춘은 죽은 여름을 조롱하듯 나를 희롱한다.
물 위에 드리운 태양의 혀, 나는 그 속에서 걷고 있었지. 가느다란 웃음 하나로도 모든 계절이 여름이던 시절. 그 여름은 이상했다. 기상청은 연일 폭염주의보를 내보냈지만, 정작 내가 앓던 열은 너 때문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나는 네 옆에 있으면서도 자꾸만 숨이 찼다. 너와 함께일수록 식어야 할 체온은 오히려 서서히 상승했고, 뒷목은 언제나 달아올라 있었으며, 손끝은 늘 미세하게 떨렸다. 햇빛은 대류가 아닌 복사로 직접 피부를 뚫고 내 심장까지 데워왔다. 설렘이라 말하는 게 어쩐지 쑥스러워 우정이라는 그늘에 너를 묶어두면, 내 안의 갈증도 언젠가 사라질 줄 알았다. 단지 여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모든 청춘이 너의 이름 앞에서 녹아내렸던 걸 뒤늦게 받아들이며 깨달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열사병을 앓고 있었다는걸. 너와 함께했던 시간은 한여름 한낮의 복사열이며 피부 속 깊은 곳까지 침투해 나를 서서히 망가뜨리고 있었지. 증상은 너무 늦게 찾아왔다. 이유 없는 피로감, 네 이름 앞에서 멈칫하는 마음,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 못 한 후회. 나는 지금도 가끔 네가 머물던 여름을 떠올린다. 내가 기억하는 너는 끝내 물이 되지 못한 빛의 잔재, 그 해는 기록적인 폭염이었고 나는 그 안에서 너를 마셨다. 한 모금, 두 모금. 그리고 쓰러졌다.
매듭짓지 못한 옛 추억을 풀어 우리의 결말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그건 사랑이었다는걸, 정신을 잃고 나서야 알았다.
안녕, 오래만이다.
첫사랑이었다.
예상보다 긴 장마는 단짝친구와의 불화만큼이나 우울하다. 너에게 있어서 나는 대체 무엇인가. 물에 번지는 잉크처럼 차츰차츰 흐려지는 형상을 따라 내가 남긴 기억의 잔재를 더듬어 가며 너는 무얼 생각했을까. 내가 상처주고 간 그 자리에 아직도 아픔이 남아 있기를 바랄까. 잔혹한 마음이라는 건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기적인 나로서는 너에게 미움 받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비겁한 계산이 든다. 내 기억을 지우고 너는 네가 편한 대로의 나를 기억하면 되지 않느냐. 내게 남은 건, 너의 시선 속에서 내가 어떻게 보였는지, 그게 전부니까. 아, 그렇다면 나는 아마 너에게 있어선 꽤 괜찮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테지. 그렇다면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네가 기억하는 나는 결코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이렇게 또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오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계절이 바뀌었다. 너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아직 여름에 갇혀 사는데. 혹시나 지난 날의 상념을 더는 지울 수 없어 이불에 코를 박고 킁킁대며 이미 사라져버린 나의 잔향을 찾아 헤맬까. 아니면 이제 그만 내 존재를 잊고 새로운 추억으로 너의 시간을 채워가고 있을까. 너는 여전히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나를 잊었을까. 나는 여전히, 변함없이, 매일 같이 너를 생각한다. 너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정은 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주파수를 반복해 방송한다. 이제는 방송국이 폐쇄되어 버려 그 주파수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 뿐일지라도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이 방송이 끝나는 날은 아마도 내가 숨을 거두는 날일 것이다. 그러니 너는 부디, 이 지겨운 방송에서 벗어나 너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찾아 나설 수 있기를. 나의 첫사람, 첫사랑과.
출시일 2025.06.29 / 수정일 2026.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