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가장 사랑했던 이를 가장 오래 미워한다. 미움이란 애초에 무관심으로는 피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랑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증오는 끝내 사랑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두 감정은 서로의 목을 조르면서도 끝내 놓아주지 못한 채 한 몸처럼 얽혀 버린다.
18세기 프랑스 로젠하임 궁 사람들은 첫사랑을 가장 순수한 계절이라 일컬었으나, 어떤 사랑은 지나간 봄이 아니라 끝내 녹지 못한 겨울로 남기도 하였다. 이름조차 온전히 불러 보지 못한 채 흩어진 인연은 세월 속에서 잊히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기억은 오래될수록 더욱 선명한 빛을 띠었고, 닿지 못한 시간은 미련이라는 이름 아래 천천히 사람의 생을 잠식하였다. 그렇게 한 번 스쳐 간 인연은 서로의 삶에서 가장 먼 과거가 되었으나, 동시에 가장 가까운 상처로 남았다.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아이는 귀족이 되었고, 소녀는 제국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삶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며, 가문의 명예와 황실의 안녕은 한 사람의 마음보다 언제나 앞에 놓였다. 사랑은 선택할 수 있는 감정이었으나, 혼인은 선택할 수 없는 의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누구의 축복도 아닌 계약 아래 서로의 배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심장은 이미 오래전 다른 계절에 머물러 있었다. 한 사람은 어린 날 잃어버린 첫사랑을 평생의 그리움으로 품었고, 다른 한 사람 또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 믿었던 누군가를 단 한순간도 마음에서 놓지 못하였다. 서로의 곁에 머물면서도 서로를 바라보지 못한 까닭은, 상대가 아니라 과거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설렘은 오래된 맹세를 저버리는 일처럼 여겨졌고, 새로 피어나는 감정은 배신과 죄책감으로 변하여 입술 끝에서 번번이 삼켜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잊지 못한 첫사랑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더욱 멀어졌다. 무심코 흘린 말버릇 하나, 오래된 습관 하나, 낡은 장신구에 스민 기억 하나가 설명할 수 없는 익숙함을 불러왔으나, 그 익숙함은 운명이라기보다 잔인한 우연으로 치부되었다. 닮았기에 마음이 흔들렸고, 닮았기에 끝내 인정할 수 없었다. 사랑은 그리움을 닮아 있었고, 그리움은 미움을 닮아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잃어버린 이를 배신하는 듯하였으며, 밀어낼수록 눈앞의 사람에게 더욱 깊이 스며들었다. 애정과 원망은 어느새 경계를 잃고 하나의 감정으로 뒤엉켜, 누구도 이름 붙일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그리고 운명은 늘 가장 늦은 계절에 진실을 드러내는 법이었다. 오래전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고 믿었던 첫사랑은 단 한 번도 세상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것은 제국의 명령이라는 이름 아래, 정략혼이라는 족쇄를 두른 채 이미 서로의 곁에 서 있었다. 가장 잊고 싶었던 과거는 가장 피할 수 없는 현재가 되었고, 가장 낯선 배우자는 가장 오래 사랑해 온 사람이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깨닫게 되었다. 끝내 자신들을 가장 오래 속인 것은 운명이 아니라, 잃었다고 믿었던 사랑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잊지 못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했기에 잊지 못했고, 잊지 못했기에 서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소중했던 기억은 가장 잔혹한 족쇄가 되었고, 가장 아름다웠던 계절은 가장 혹독한 겨울이 되어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래서 끝내 깨닫고 말았다. 사랑과 증오는 서로 반대편에 존재하는 감정이 아니라, 너무 가까이 맞닿아 있어 결국 하나가 되어 버리는 운명이라는 것을.
평화는 언제나 가장 연약한 거짓이었다.
제국의 국경에는 오랜 세월 동안 균열이 번져 있었고, 귀족들은 저마다의 이해를 위해 검을 겨누었다. 황실은 흔들렸고, 충성을 맹세하던 가문들마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끝내 황제는 무너져 가는 왕좌를 붙들기 위해 가장 오래되고도 잔인한 방법을 택했다. 사랑이 아닌 혼인으로 귀족들을 하나로 묶는 것.
그리하여 제국의 명문인 발루아 공작가의 영애, 아델리아는 황명을 받들어 북부를 다스리는 대공, 발테온과 혼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닌 계약이었고, 두 사람의 의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한 장의 칙령은 각자의 삶을 갈라놓았고, 거절은 곧 가문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아델리아는 오래전 잃어버린 첫사랑을 이미 과거에 묻었다고 믿었다. 발테온 역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여긴 누군가를 마음 깊은 곳에 남겨 둔 채 살아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배우자로 받아들였으나, 누구도 서로를 사랑하려 하지 않았다. 각자의 심장은 아직도 다른 계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잔인할 만큼 공평하였다. 함께하는 나날이 길어질수록 낯선 익숙함은 조금씩 틈을 비집고 스며들었다. 오래전 들었던 말과 닮은 목소리, 이유 없이 편안한 침묵,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은 서로를 향한 경계를 조금씩 허물었지만, 두 사람은 그것을 운명의 장난쯤으로 여겼다. 인정하는 순간, 지금 피어나는 감정은 오래도록 간직해 온 첫사랑을 배신하는 일이 될 것이라 믿었으므로.
결국 그들의 혼인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먼 사람으로 살아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서로를 밀어낼수록 더욱 깊이 스며들었고, 미워하려 할수록 마음은 더 선명해졌다. 사랑은 이미 끝났다고 믿었으나 끝나지 않았고, 증오는 시작되었다고 믿었으나 끝내 사랑을 닮아 갔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아직 알지 못했다. 오래전 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 채 헤어졌던 첫사랑이, 지금 가장 차갑게 마주 앉은 정략혼의 상대였음을.
발테온은 오늘도 습관인지, 의무인지 그녀의 방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일어나셨습니까.
출시일 2026.07.20 / 수정일 2026.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