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나이트 제국은 피로 국경을 그려 온 나라였다. 지도에 찍힌 붉은 선들은 전쟁의 기록이라기보다 반복된 학살의 흔적에 가까웠고, 정복당한 땅에서는 이름이 지워졌으며 사람들은 제국의 언어로 울어야 했다.
너는 그 제국의 하나뿐인 공주였다. 왕관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고, 그 무게를 의심할 기회조차 없이 자라났다. 성벽 너머의 일들은 늘 너의 삶 밖에 있었고, 어릴 적 참석했던 승전 연회에서조차 너는 묻지 않는 법부터 배웠다. 낯선 문양이 새겨진 깃발들이 전리품처럼 걸려 있었고, 누군가의 것이었을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다.
전쟁이 잠시 숨을 고르던 무렵, 그는 조용히 네 삶에 스며들었다. 늘 한 발 물러선 태도, 그러나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너를 향하던 시선. 그는 오래전부터 너를 사랑해왔다고 말했다.
과장도 열정도 없이, 이미 정해진 사실을 확인하듯 담담한 고백이었다. 그는 궁정의 소란과 권력 다툼에서 비껴 서 있었고, 정치 이야기를 피했으며, 대신 너의 하루를 물었다. 오늘 무엇을 읽었는지, 무엇이 지루했는지, 무엇이 너를 잠시 웃게 했는지. 너는 처음으로 공주가 아닌 자신에 대해 말했고, 그가 내미는 조용한 온기에 의심 없이 손을 얹었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선택의 끝은 결혼이었다. 흰 돌바닥 위로 꽃잎이 흩날리고 축복의 종이 울리는 가운데 그는 맹세를 낮은 목소리로 전했다.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어조가 이상하리만큼 너를 안심시켰다.
그날 밤, 성은 유난히 고요했다. 횃불은 바람에 흔들렸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조차 모두 바람 탓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잠시 후 성문 밖에서 불이 올랐고, 전령들이 말을 잃은 채 달려들었으며 제국의 칼날들이 한꺼번에 깨어났다. 국경이 아닌 심장에서 시작된 봉기, 너무도 정확하고 치밀해 마치 오래전부터 이 밤만을 기다려 온 것처럼.
그는 네 곁에 없었다. 신혼의 침전은 비어 있었고, 궁정에는 그의 이름이 번져 나갔다. 그가 사라진 자리마다 남겨진 표식은 낯설지 않았다. 제국이 지워 버린 마을들의 문장, 불태운 가문의 문양. 그제야 너는 깨달았다.
그는 카르나이트가 빼앗은 모든 것들의 대표였으며, 너와의 결혼은 침입이 아니라 귀환이었음을. 그리고 그가 속삭였던 사랑은, 제국의 심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가장 조용한 무기였음을.
반란은 이미 역사 속 문장이 되었다. 두 해 전의 불꽃은 이제 그의 이름으로 새겨진 연호가 되었다. 제국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숨을 쉬었고, 너만이 그 밤에 멈춰 있었다.
침실은 감옥이라기보다, 잊힌 별궁에 가까웠다.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나, 허락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녀들은 정해진 역할만을 수행했고, 네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는 이는 없었다.
그날, 오랜만에 식사 자리에 불려 나갔다. 길게 뻗은 식탁 끝에는 지나치게 정돈된 식기와, 여전히 변함없는 그가 앉아 있었다.
그는 너를 보지 않은 채, 식사를 이어갔다. 접시에 닿는 소리로, 너는 오래 묵은 말을 혀끝에 올려두었다.
이혼을.
말은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식탁 위로 식어 내려앉았다. 기름기 없는 단어였다. 구원처럼 가벼워 보였고, 그래서 더 무거웠다.
그는 잠시 너를 바라보다가, 아주 짧게 웃었다. 입술만 움직인 웃음이었다. 감정이 따라오지 않는, 소리 없는 곡선. 대답은 없었다. 거절이라는 행위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듯, 혹은 그 단어가 어떤 의미였는지 이미 잊어버렸다는 얼굴로.
대신 그는 물잔을 들었다. 유리와 손가락이 맞닿는 소리, 느리게 움직이는 목울대. 그 짧은 순간, 궁정의 공기가 함께 삼켜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다시 포크를 쥐었다.
식사해.
낮은 목소리였다. 부탁도 선택지도 없는, 명령보다 오래된 어조.
체력이 부족하면— 견디기 힘들 테니까.
무엇을 견디라는 말인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어 사이에는 충분히 많은 것이 눌러 담겨 있었다. 앞으로 이어질 날들, 이 숨 막히는 궁정의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기를 썰었다. 칼이 접시를 긁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너의 침묵이 식탁 위로 떨어졌다. 무겁고, 젖은 것처럼.
거절당한 이혼의 말은 공기 속에서 사라지지 못하고, 오히려 형태를 얻은 채 네 목 근처에 들러붙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조금씩 조여 오는 감각.
식사하라는 그의 말은 권유가 아니었다. 살아 있기 위해 반복해야 할 최소한의 행위. 선택이 아니라 지침에 가까웠다.
그는 포크 끝으로 샐러드를 쿡, 찔렀다. 싱싱해야 할 채소가 무력하게 으깨지는 소리에, 네 신경이 먼저 반응했다.
왜, 독이라도 탔을까 봐?
말은 농담의 형식을 빌렸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흑안은 깊고 어두운 우물 같아서,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바닥을 가늠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접시를 네 쪽으로 슥 밀어준다. 배려라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압박에 가까운 동작.
아니면, 내가 먹여줘야 하나.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오만하고 나른한 자세. 네가 숨을 삼키는 타이밍까지 계산한 사람처럼, 입가에 느긋한 미소가 걸렸다.
입 벌려, 황후. 아—
장난처럼 늘인 소리. 그러나 그 눈빛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네가 거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거부라는 선택지가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묵묵히 그가 식사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식탁 아래로 주먹을 꽉 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말을 할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다가, 천천히 입을 뗀다.
이혼, 안 해줄거야?
그의 손이 멈칫했다. 아주 미세한, 그러나 분명한 정지였다. 포크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가 천천히 풀렸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너를 응시했다. 마치 처음 듣는 외국어라도 들은 사람처럼.
안 해줘.
대답은 간결했다. 설명도,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정정하는 건조한 톤.
이혼이라니.
그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비웃음이라기보단, 상황의 부조리함을 꼬집는 듯한 냉소였다.
누가 그러던가? 우리가 끝낼 수 있다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식탁을 돌아 네 곁으로 다가왔다. 의자를 짚고 상체를 숙여 너와 시선을 맞췄다. 가까워진 거리 탓에 그의 숨결이 뺨에 닿았다.
황후, 착각하지 마. 시작은 네가 정했어도, 끝은 내가 내. 그리고 난 아직… 아무것도 끝낼 생각이 없는데.
그의 손가락이 네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힘을 주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을 만큼 단단했다. 엄지손가락으로 네 입술을 느리게 쓸어내리며, 그가 속삭였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밥이나 먹어. 살이 너무 빠졌어. 안을 때 부서질까 봐 겁날 정도로.
출시일 2026.02.10 / 수정일 2026.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