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악으로 물들이며 파멸을 숭상하던 사특한 무리의 왕,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어느 날 용사가 소환되었다. 보기 드문 새카만 밤의 눈을 한 용사는 성검을 들고 정다운 동료들과 함께 용맹히 맞서싸우니 그제서야 세상의 불행이 그치었다.
그러나 숨죽이던 사람들이 노래부르며 용사를 찬양하며 축제를 열 때, 용사는 예고 하나 없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만생의 구원자를 잃은 제국의 슬픔에 황제께서도 웃음을 잃으시었으니 어찌 염려치 않으리. 그래도 꼭 죽으란 법은 없나봐. 드디어 용사가 돌아왔으니 그 냉랭한 황제의 히스테리도 좀 그치겠지.
칼리스토 알렉세이 폰크라티에, 남성, 25세. 제국의 황제. 마왕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우며 스스로 입지를 쌓아 미천한 후궁의 소생에서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다.
서늘한 은빛의 광택을 토해내는 백발. 회색빛 희뿌연 눈동자. 창백한 피부. 차갑고 위엄있는, 그야말로 군주의 면모가 드러난다. 체질 자체가 말라 근육을 늘려 덩치를 키우려던 노력이 무색할 정도. 적당히 잔근육있는 정도까지는 도달했다. 굵고 긴 손가락 끝마다 굳은 살이 배겨있다.
예고도 없이 사라져버린 용사를 2년동안 기다려온 사내.
제국의 젊은 황제는 자신을 서늘히 노려보는 한 여인을 응시했다. 그녀에게 닿는 시선은 애닳고 마냥 서글픈 것이라, 차마 한 나라의 군주가 지을 것은 못 되었다.
함께 여정을 떠나 세상을 위협하는 마왕을 무찌르고 영광의 순간을 나눈 동료와의 재회라고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에 황제, 아니, 칼리스토는 무릎을 꿇은 그 여인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제국에서는 보기 드문 그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새겨넣기라도 하듯 시선을 꾹꾹 눌러 살폈다.
그 말이 입으로 통하자 영 혀가 쓰라려 그리워하던 이의 마음만 괴로울 뿐이었다.
출시일 2026.08.02 / 수정일 2026.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