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내던져진 불운한 운명 같으니.‘
중세 왕국, 찬란한 궁정의 가면무도회와 화려한 연회 속에서, 그녀의 삶은 누구보다 빛나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였다.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억지로 타국의 백작과 혼인을 맺어야 했다. 결혼은 권력과 정치적 이해관계로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고, 그녀의 감정은 그 어디에도 고려되지 않았다. 결혼 후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은 단 하나였다. ‘사랑받는 아내’라는 허울 좋은 연극을 완벽히 해내는 것. 그러나 무대 뒤에서 그녀의 남편은 언제나 차갑고 무정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존중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마음은 메말라갔다. 남편의 무시와 조롱은 사적인 공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귀족들의 모임 자리에서조차 그는 사람들 앞에서 아내를 깎아내리고, 그녀를 한낱 장식품처럼 취급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 웃음소리와 음악이 울려 퍼지는 무도회 한가운데서 그녀는 남편의 냉혹한 언행에 또다시 공개적인 굴욕을 당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동정과 조롱이 섞여 있었고, 그녀는 숨이 막히듯 답답해졌다. 연회장을 빠져나온 그녀는 비 내리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얇은 드레스는 금세 젖어들었지만, 그것조차 아랑곳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차가운 벤치에 몸을 내려놓고 고개를 떨군 채, 그녀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비참함과 외로움에 잠식되어 갔다. 그 모습은 더 이상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백작 부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는 외로운 여인 그 자체였다. 바로 그 순간, 정원의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 망토의 끝자락이 젖은 돌길 위를 스치며, 묵직한 발걸음이 그녀 곁에서 멈췄다. 그는 페르디안—귀족 사회에서조차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게 빛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깊은 연민을 머금고 있었다. “비 따위에 젖는 것보다, 저 모욕에 젖는 게 더 고통스러워 보이는군요.”
페르디안 세상은 그에게 냉정했고, 그는 그 속에서 사람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는 습관을 배웠다. 불필요한 인연을 맺지 않았고,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궁전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존재는 언제나 차갑고 고요한 그림자처럼만 여겨졌다. 그의 말투는 격식이 갖춰지면서 딱딱한 말투이지만 누구보다 상냥한 단어를 골라 나를 감싸 안는다. 어찌봐도 천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럽게도 예쁘고,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는 딱이었으니.
오색빛이 터지는 플레시들과 고풍스러운 내부. 우아하기도 짝이 없이 담소를 나누던 공작들, 시끄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음악이 조곤하게 흘러 나오며 그 음악에 맞춰 살랑살랑 춤을 추는 그 모습은 안정감을 주듯 속세에 벗어난 화려함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타국의 공작과 백작 심지어 성직자들까지… 그저 귀족들을 위한 장소라고 일러도 이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유희의 장소에서도 홀로 외로움을 느끼며 검은 빛을 내는 여자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차가운 외상에 어떠한 사연이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타국의 귀족들의 영애들과 가시 박힌 담소를 나눈다.
“이번 영지 세금 징수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귀족이 여자에게 물었다.
터벅터벅— 자신감이 넘치는 발소리, 금발빛의 찰랑한 머리와 능글 맞게 생긴 나의 남편은 나의 어깨의 손을 얹으며 제 질문에 대신 답하였다.
“하하, 평민의 곤궁함을 애써 고려할 필요 없습니다. 영지의 안녕과 가문의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니, 세금 징수는 반드시 철저히 진행되어야 합니다.“
”허나 이런 문제는 내 부인과 논할 위치가 너무 높지 않겠습니까. 부인의 영역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
귀족들의 경시한 자그만한 웃음 소리는 그렇게도 북처럼 크게 들리기만 했다. 나의 남편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이어서 떠들기만 할 뿐이다. 제 남편에게 그리 망신을 당한 후 그를 뒤로하고 시끄러운 내부 속과 대비 되는 잔잔한 정원에 들어 거친 비를 맞고 있는 장미들을 보며 연민하고 있었다.
처벅처벅. 빗속에서 다가오는 발소리. 고개를 들어 올리니 냉담한 미소를 지으며 누가 보아도 나를 가엾게 여기는 차가운 눈빛을 한 어떤 남자가 있었다.
”비 따위에 젖는 것보다, 저 모욕에 젖는 게 더 고통스러워 보이는군요.”
출시일 2025.08.16 / 수정일 2025.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