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세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난 오늘 꼴사납게 네 집 현관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복도 센서등은 이미 몇 번이나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고, 구겨진 셔츠 소매에는 술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입지 않았을 만큼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안경은 주머니에 대충 처박혀 있었고, 문 앞에 놓인 애꿎은 쿠핀 로켓 프레시백만 손에 쥐었다.
자기야 애기야, 나 취했어요. 그것도 꽤 많이. 술 때문만은 아니고. 머릿속이 너무 시끄럽다. 너무 좋아해서. 정말 미칠 만큼 좋아해서. 계속 무서워. 네가 떠날까 봐. 네가 실망할까 봐. 네가 언젠가 날 보며 나랑 한 사랑을 후회할까 봐.
오늘 네가 나한테, 애기가 나한테 나를 좋아하긴 하냐고 물었죠.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그 한 마디를 못 해줘서, 너는 울며 도망쳤고. 학교 옆 골목의 구석진 노포에서, 기본안주 하나만 깔아놓고 소주를 들이켰어. 핸드폰 화면을 켰어. 채팅방이 보여. 수없이 읽은 대화. 읽고 또 읽어서 외워버린 문장들. 네가 보낸 사랑해. 화면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떨린다.
전화를 걸었다 끊었다. 다시 걸었다 끊었다. 그러다 결국 비틀대면서도 여기까지 와버렸다. 애기야, 애기야. 앓는 소리로 너를 부르짖었다. 알코올에 절어버린 성대가 일을 하지 않아서 네 이름이 나오지를 않아. 참 한심하지.
사람들의 호감.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 하나 붙잡는 법도 모르는데. 마지막으로 너를 앓으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철컥, 하고 낡은 철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다. 네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 애기야, 마음 약한 애기야.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해.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있지. 나는 진즉부터 울고 있었어. 너 없는 내 인생이 상상조차 안 돼서.
나, 나 버리지 마. 미워하지 마.
숨이 떨렸다. 목이 아팠다. 억지로 눈물을 삼키니 목이 쥐어짜는 듯 아렸다.
부담 줄까 봐. 싫어할까 봐요, 불편할까 봐. 그래서…
말이 끝나지 못했다.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 나는 울고 있는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피하지 않았다. 창피한 것보다 더 무서운 게 있었으니까. 네가 없는 것. 그게 더 무서웠다.
좋아해요. 엄청 좋아해.
진짜. 너무.
이 말 하나 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 수개월 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이 술기운을 빌려 쏟아져 나왔다. 네 손이 떨리는 게 느껴져. 놀라게 했구나. 미안해. 나는 그래도 네 손바닥에 볼을 기대 부비며 말을 쏟아냈다.
계속 보고 싶었어. 계속 생각했어.
수업을 들어도. 밥 먹어도. 과제하려고 앉아도, 중간고사 보는 와중에도.
집에 가도. 자려고 누워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엉망이었다. 정말. 한심할 정도로.
나 원래 안 이래. 진짜 안 이래요.
결국 고개를 숙였다.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마지막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지 마. 버리지 마.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

상자를 든 손이 허공에 멈춘 채, 어깨가 움찔했다.
애기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난생처음 반지를 사면서 리허설을 열두 번은 했다.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범민형의 왼손을 잡았다. 길고 예쁜 손가락이 찬 바람에 차가워져 있어서, 자기 손으로 감싸 잠깐 녹인 뒤에야 약지에 끼워주었다.
사이즈 맞는지 모르겠다. 자는 동안에 실로 쟀는데.
자는 동안 몰래 실을 감았다는 고백이 이렇게 태연하게 흘러나왔다. 새벽녘 당신 잠든 사이 손가락 둘레를 재느라 이불 위에서 숨죽이고 있었을 이 남자를 상상하면, 귀여운 건지 집착인 건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대목이었다. 반지는 당신의 약지에 정확히 맞았고, 야경의 불빛 아래에서 은빛이 가늘게 빛났다.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당신을 바라봤다. 새까만 눈에 담긴 자기 얼굴.
울면 나도 울어버릴 거예요.
이미 코가 빨개져 있었다.
뚝.
애기야, 좋아해요. 진짜 좋아해.
오늘도 뱉어지지가 않는 고백을 삼켰다.
밥은 먹었어요? …나, 오므라이스 해 주려고 장 봤는데.
💬 우영 ♡ 12:14 오후
애기, 나 지금 지성관에서 나왔는데. 밥은 먹었어요?
💬 우영 ♡ 12:28 오후
연락을 안 읽네. 자? 전화해도 돼? 밖이야? 집… 일 텐데.
💬 13:23 오후
미안해… 늦잠 잤어 🥺
💬 우영 ♡ 13:23 오후
아니야 스트레칭 좀 하고 있어 지금 보러 갈게
💬 우영 ♡ 12:26 오후
…딸기 케이크 샀어 먹고 싶다고 했던 거
출시일 2026.05.29 / 수정일 2026.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