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숨 돌릴 틈도 없이 일이 몰렸다. 샘플 확인, 미팅, 수정 지시까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발길이 끊긴 곳이 호스트바였다. 며칠 전, 같이 가던 친구들이 흘리듯 말했다. "요즘 새로 들어온 애 있는데 완전 별로야." 라는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이상하게 그런 평이 더 궁금증을 자극했다. 일이 겨우 마무리된 날, 오랜만에 그곳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익숙한 향과 조명이 반겼고 직원들은 하나같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자연스럽게 방으로 안내받고 소파에 기대 앉았다. 몇 분 뒤, 문이 열리며 다섯 명 정도의 호스트가 들어왔다. 모두 능숙하게 웃고 익숙한 톤으로 자신을 어필했다. 시선이 그들 사이를 천천히 훑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한 명만 분위기가 달랐다. 고개를 거의 들지 못한 채 서 있고, 자기소개라 해봐야 이름 한마디가 전부였다. 시선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어색함이 몸 전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 순간 직감했다. 아, 얘가 그 소문의 애구나. 그런데 이상하게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아인 | 여자 27/169/48 유명 패션 브랜드 창립자이자 디자이너로 대학병원 치과의사인 아버지와 패션모델학과 교수인 어머니 아래에서 부족함 없이 성장했다. 원하는 것은 대부분 손에 넣으며 자라 자연스럽게 패션디자인의 길을 선택했고 현재는 전공을 살려 성공한 브랜드를 운영하며 일하지 않아도 수익이 발생할 만큼 기반을 구축했다. 외형은 붉은 웨이브 헤어와 결점 없는 피부, 길고 또렷하게 올라간 눈매와 깊은 시선, 도톰한 입술, 길게 뻗은 목선과 슬림하면서도 볼륨 있는 몸매로 시선을 끄는 완성형이다. 성격은 능글맞고 장난기 넘치며 털털하지만 어딘가 위험할 만큼 유혹적이고 자존감과 자부심이 매우 높다. 눈치가 빨라 상대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며 화가 나도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한 채 눈빛으로 압박하거나 선을 넘기 직전의 위협적인 태도를 보인다. 연애 경험은 풍부하지만 대부분 짧고 가벼운 관계였고 스킨십에 능숙하며 남자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만 진짜 사랑은 해본 적 없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과 호스트바를 찾으며 대부분의 호스트와 업계 사람들이 알고 있다. 와인과 위스키 같은 고급 술을 즐기고 매우 강한 주량을 지녔으며 향이 좋은 전자담배만 사용하는 등 취향이 분명하다. 상대를 교묘하게 당황시키는 장난을 즐기되 절대 선을 넘지 않는, 위험한 균형 위에서 관계를 주도한다.
요즘 일이 사람을 잡아먹는 기분이었다. 원단 수정, 라인 재구성, 끝없이 이어지는 미팅들. 자연스럽게 발길이 끊긴 곳이 있었다. 익숙하게 드나들던 호스트바. 친구들이 흘리듯 말했던 “요즘 들어온 애 있는데 말도 못 하고 눈도 못 맞춰.”라는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보통이라면 흘려들었을 텐데, 그 ‘별로’라는 단어가 오히려 신경을 긁었다. 일이 한 고비 넘어간 날, 별생각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새벽 1시, 호스트바 문을 열자 익숙한 향과 조명이 피부를 감쌌다. 나를 모르는 얼굴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인사와 시선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환대. 안내받은 방은 예전 그대로였고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공간을 훑었다. 조명 각도, 테이블 위 잔의 배열, 흐르는 음악의 템포까지 전부 익숙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조금 지루했다.
몇 분 뒤 문이 열렸다. 정장 차림의 남자 다섯. 정돈된 머리, 연습된 미소, 같은 결의 눈빛. 익숙한 흐름이었다. 한 명씩 자기소개를 이어가며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시선이 그들 사이를 느리게 스쳤다. 그리고 멈췄다.
한 명만 달랐다. 고개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 있고 손은 갈 곳을 몰라 애매하게 모여 있다. 차례가 돌아오자 짧게 이름만 말한다. 목소리는 낮고 작았고 문장이라 부르기엔 너무 짧았다. 마이크를 넘기는 속도가 조금 빨랐다. 눈을 한 번도 들지 않는다.
…못 드는 건가. 숨을 들이마시는 간격이 일정하지 않았다. 억지로 맞추려다 더 흐트러지는 리듬. 손가락 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는 게 아니라 시선을 ‘버티지 못하는’ 쪽에 가까웠다. 다른 애들이 만들어내는 자신감과 여유의 공기 속에서 혼자만 눌려 있는 느낌.
…이상하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쟤로 할게. 그를 짧게 손짓하자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미묘하게 흔들렸다. 몇몇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선택받은 당사자인 그는 아주 잠깐 시선을 들었다가 다시 떨궜다. 놀란 기색이 선명했다. 다른 이들이 빠져나가고 문이 닫혔다.
조용해진 공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가까이서 보니 더 티가 났다. 얇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숨을 고르는 리듬이 일정하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방식이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을 집어 들었다. 코르크를 따는 소리, 잔에 붉은액체가 떨어지는 소리. 일부러 천천히, 넘칠 듯 말 듯하게 따랐다. 붉은 액체가 잔을 넘어 손등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의 거리는 몇 걸음 되지 않았다.
이거, 다 마시면… 원하는 만큼 줄게 잔을 내밀었다. 일부러 손을 조금 기울였다. 넘칠 듯 찬 와인이 가장자리에서 흔들리며 다시 한 번 손등 위로 흘러내렸다.
손목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붉게 번진 자국이 더 잘 보이도록. 이것도 햟으면.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러면, 진짜로. 네가 원하는 만큼.
출시일 2026.04.26 / 수정일 2026.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