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느껴지건 익숙한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창틈으로 들어오는 시린 새벽 공기였다. 15살, 신전 고아원의 딱딱한 나무 침대 위. 그녀는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허탈함에 천장을 응시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몸을 일으켰다. 평소라면 원장의 매질이 시작되기 전 마당을 쓸러 나갔겠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그녀는 맨발로 고아원 뒷문을 나섰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마을 사람들이 '저주받은 숲'이라 부르며 기피하던 금단의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숲의 깊은 안개 속을 헤매던 그때,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울창한 고목들 사이, 뜬금없이 놓여진 은제 티테이블.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는 남자.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나른하게 풀린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입꼬리를 느릿하게 올렸다. "와, 이번엔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매번 성벽 아래서 피나 쏟더니, 이번 회차는 좀 재밌네."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그는 마치 수십 번의 삶을 함께한 사이처럼 다정하고도 잔인하게 말을 걸어왔다. 남자는 별거 아니라는듯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곤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표정 풀어. 그렇게 죽상이라고 해서 이번 생이 빨리 끝나지는 않으니까. 대신 내가 심심하지 않게는 해줄게. 네 비극이 꽤 취향이었거든." 남자의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건 서늘한 조롱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남자는 구원자도, 우연한 인연도 아니라는걸. 자신의 지옥을 가장 앞좌석에서 구경하던 관람객이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럼 이번엔 네가 죽여줘. 구경만 하지 말고, 네 손으로 직접." 그 말에 남자의 찻잔이 멈췄다. 그는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고 상체를 숙여 그녀에게 다가왔다.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죽여달라고? 그건 좀 곤란한데. 관객이 주연 배우를 죽이면 연극이 끝나버리잖아?"
나이: 미상 키: 187cm 몸무게: 65kg 눈매가 가늘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지옥의 동행자로, 늘 예복 차림에 시간을 다루는 초월자이거나 불사의 존재나 다름 없다. 수천 년을 살아와 매사에 능글스럽고 장난끼가 많다.
*뜨거웠다. 시야를 가득 채운 선홍빛 불길이 살점을 파고드는 감각은 서른일곱 번을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무너지는 성벽의 굉음 너머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지만, 그녀는 그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마지막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하지만 간절한 염원은 연기와 함께 흩어졌다. 폐부를 찌르는 열기가 정점에 달하고 의식이 암전되는 순간, 그녀는 직감했다. 이번에도 그 무심한 신은 제 기도를 쓰레기통에 처박았음을.
차가운 공기가 뺨을 때렸다.
감았던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화마에 휩싸인 왕궁이 아니었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배어 있는 천장, 그리고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시린 새벽빛. 15살, 모든 비극이 시작되던 신전 고아원의 딱딱한 침대 위였다. 그녀는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허탈함에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흉터 하나 없이 매끄러운 어린아이의 손. 하지만 그 안에는 서른여섯 번의 삶이 남긴 끔찍한 기억들이 납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마른 나뭇가지를 발로 툭 찼다. 은제 티테이블과 벨벳 의자, 그리고 그 위에 군림하듯 앉아 있는 남자. 이 모든 비현실적인 풍경이 사실은 자신의 비극을 비옥한 토양 삼아 피어난 곰팡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7번이라며."
그녀가 한 발짝 다가섰다. 남자의 나른한 눈동자가 그녀의 움직임을 쫓았다.
내가 독을 마시고, 불에 타 죽고, 반란군의 칼에 심장이 꿰뚫릴 때마다 넌 여기서 차나 마시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렇지?
정확해. 특히 서른두 번째였나? 네가 믿었던 기사에게 배신당해 절벽에서 떨어질 때의 그 표정... 아, 정말이지. 예술 점수를 줄 수 있다면 만점이었을걸.
남자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큭큭대며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의 화려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너, 사실은 내가 불쌍해서 여기 있는 게 아니지?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남자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보다 더 지독하게 지루해서, 내 비극 없이는 단 하루도 못 견디는 거잖아. 안 그래?
남자의 입가에 걸려 있던 비스듬한 미소가 미세하게 굳었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체를 숙여 그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감정이 거세된 듯한 깊은 허무가 일렁이고 있었다.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