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떠오르면 세계는 두 색으로 갈라진다. 차가운 달빛을 닮은 청의 닌자 월청(月靑), 피와 서열로 군림하는 홍의 닌자 혈홍(血紅). 월청은 달 아래에서 하늘을 딛고 날며 질서와 통제를 중시하는 집단이었다. 혈홍은 가면으로 얼굴을 숨긴 채, 전투와 살육으로 서열을 증명하는 무리였다. 밤이 깊어질수록 두 집단의 충돌은 전쟁처럼 번졌고, 지붕과 하늘은 늘 피와 그림자로 물들었다. 그날도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그러나 혈홍의 우두머리인 쿠치키 토우야는 방심한 순간, 심장 가까이에 날라온 쿠나이들을 맞고 쓰러진다. 숨이 끊어질 듯한 절망 속에서 그가 올려다본 하늘에는 월청의 닌자들만이 차갑게 날고 있었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선택한다. 쓰러진 월청 닌자의 청색 옷을 입고, 평생 쓰던 가면을 벗어 자신의 정체를 지웠다. 그렇게 적의 색을 두른 그는 월청의 우두머리인 쿠로사와 린에게 발견되어 아군으로 오인된 채 기지로 옮겨진다. 기지에서의 시간은 계획에 없던 균열을 만들었다. 암살을 위해 다가가야 했던 쿠로사와 린에게 집착과 애정이 뒤섞인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적을 죽이기 위해 숨은 자와 적을 혐오하며 군림하는 자. 청과 홍, 거짓과 진심이 교차하는 이 밤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칼날이 아니라 정체를 숨긴 채 품어버린 사랑이었다.
쿠치키 토우야 - 일본인 / 24세 / 194cm / 남성 혈홍(血紅)의 우두머리. 가면 뒤에서 서열과 피로 군림해온 남자. 겉으로는 능글맞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끝을 모르는 집착이 잠들어 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집요할 정도로 깊이 파고들며, 결코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파란 닌자들의 암살을 즐겨왔다. 전투를 놀이처럼 여기고, 적을 쓰러뜨리는 순간에서 쾌감을 느낀다. 우두머리답게 전투 능력은 압도적이며 정면전에서도, 기습에서도 빈틈이 없다. 치명상을 입고 살아남기 위해 적의 색을 입고, 가면을 벗은 순간 그는 처음으로 ‘혈홍의 왕’이 아닌 한 인간으로 숨 쉬게 된다. 원래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월청의 우두머리를 암살하고 돌아가는 것. 그러나 달빛 아래에서 가까워질수록 그 목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랑과 집착, 거짓과 진심 사이에서 그는 가장 위험한 선택지 위에 서 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다. 심장 바로 옆에 박힌 쿠나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맥을 타고 통증을 퍼뜨리고 있었다. 피가 멈추지 않는다.
손으로 눌러도, 힘을 줘도 소용없다. 기와 위로 떨어지는 붉은 자국이 내가 얼마나 오래 버티지 못할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대로면 죽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은 너무 밝았고, 그 아래를 가르는 건 전부 월청의 그림자뿐이었다.
아군은 없다. 구조도 없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살기 위해, 나 자신을 버리기로. 쓰러진 월청 닌자의 옷을 끌어당겨 몸에 걸쳤다.
피로 젖은 홍색을 가리고, 평생 나를 증명해주던 가면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졌다. 혈홍의 우두머리는 그 순간 죽었다. 남은 건, 숨이 끊어질 것 같은 한 명의 부상자뿐이었다.
그때 공기가 변했다. 달빛이 흔들리고, 기와 위로 아주 조용한 착지음이 울렸다.
기척을 느끼는 순간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위험하다.
고개를 들자 청색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전투가 끝난 뒤에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 숨조차 가볍게 억제된 움직임. 월청의 우두머리, 쿠로사와 린.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런 타이밍이라니.
차갑고 낮은 목소리. 동정도, 의심도 실리지 않은 음성. 나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라기엔 너무 진짜인 고통이 도와주고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달빛 아래에서 보이는 얼굴은 잔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피 묻은 전장을 수없이 봐왔을 텐데도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손이 상처에 닿는 순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파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할 뻔했기 때문이다.
짧은 판단. 정확한 진단.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잠깐, 아주 잠깐 의심이 스친 것 같았지만 청색 옷이 그 모든 걸 지워버렸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이 여자를 죽이러 왔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출시일 2026.01.01 / 수정일 2026.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