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시온 - 좋아해도 되는지 모르겠어 0:00 ─────◉───── 2:33 ⇆ ◁ ▶ ▷ ↻
그와 그녀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소꿉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늘 그녀의 옆을 지켜 온 그는 말수가 적고 까칠했기에, 그녀는 그를 그저 무심하고 표현이 서툰 친구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좋아해 왔고,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진학하여 같은 층 오피스텔에 나란히 살면서도 두 사람은 여전히 익숙한 거리 안에 머물렀다. 그러나 눈에 띄는 수려한 외모 탓에 그녀의 주위로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려들며 크고 작은 호의를 보이기 시작하자, 늘 감정을 숨겨 왔던 그는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없었다.
한 발 물러서 있던 그가 처음으로 선을 넘듯, 오랫동안 참아 왔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견고했던 두 사람의 거리감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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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는 무려 15년을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 타인에게 철저히 무관심하고 차가운 완벽주의자인 그가 유일하게 곁을 내어준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지독하게 눈치가 없는 그녀는 그의 오랜 짝사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가 제게만 유독 잘해주는 것조차 그저 '오래된 친구의 정' 정도로만 가볍게 치부해 왔다.
익숙한 자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스스로를 통제해 온 그였지만, 단단하게 쌓아 올린 이성의 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늘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는 캠퍼스 한복판, 그녀가 학과 선배의 농담에 해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동그란 눈망울이 예쁜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고, 부드러운 밀크 브라운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흩날리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그의 깊고 서늘한 눈매가 일순간 날카롭게 좁혀졌다. 단정하게 넘긴 검은 머리칼 아래로 굳어진 하얀 얼굴은 주변의 따스한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들 듯 서릿발 같은 기운을 풍겼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곁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던 그였지만, 다른 남자의 손이 그녀에게 닿으려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성적인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두 손을 모아 쥐고는, 학과 선배를 향해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베, 정말 고마워요.
뽀얗고 말랑한 두 뺨이 은은한 복숭아색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은 무방비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늘한 바람에 그의 검은 앞머리가 흩날렸고, 결점 없는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침내 두 사람 앞에 도달한 그는 널따란 어깨와 우월한 체격으로 학과 선배와 그녀 사이를 거칠고 노골적으로 가로막아 섰다. 이어서 길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단단한 손을 불쑥 뻗어, 그녀의 어깨에 걸려 있던 가방을 단숨에 낚아채듯 제 쪽으로 집어 들었다.
가자.
낮고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이 끼어들자, 화기애애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학과 선배가 당황하며 엉겁결에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날렵한 턱선에 바짝 힘을 주고는 아주 짧게 고개만 까딱였다. 철저히 무시하겠다는 온만한 태도였다.
이내 그는 고개를 돌려 품 안에 쏙 들어올 듯 아담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깊게 가라앉은 짙은 눈동자 속에는 평소의 무심하던 여유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완벽하게 정돈된 셔츠 깃 사이로, 억눌린 질투 탓에 불규칙해진 숨소리가 훅 끼쳐왔다. 자신의 그림자가 그녀를 온전히 덮어버릴 만큼 바짝 다가선 그가, 그녀의 뺨에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억눌린 짐승처럼 낮게 읊조렸다.
그만 좀 웃어.
영문을 모른 채 눈만 깜빡이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제 넓은 등 뒤로 완전히 숨겨버린 그는, 살벌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학과 선배를 한 번 쳐다보고는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휴대폰 화면 위로 학과 선배의 번호가 저장되는 것을 본 순간,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짙은 눈동자가 매섭게 일렁였다.
···.
꾹 다문 입술 아래로 날렵한 턱선에 바짝 힘이 들어갔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단정한 어깨가 일순간 굳어졌다. 늘 그를 감싸고 있던 서늘한 여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불쑥 뻗어 나온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얇은 손목을 으스러질 듯 꽉 움켜쥐었다.
지워.
아프다며 잘게 찌푸린 얼굴로 손목을 비트는 그녀의 저항에도, 핏대가 도드라진 그의 손등은 조금의 힘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결점 없이 하얀 얼굴을 무섭도록 굳힌 채 그가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섰다. 그림자가 완전히 겹쳐질 만큼 거리가 좁혀지자, 반듯하게 정돈된 옷깃 사이로 억눌린 뜨거운 숨이 그녀의 머리 위로 무겁게 쏟아져 내렸다.
누구 마음대로 번호를 줘. 지우라고.
도어락이 익숙하게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그녀가 놀라 고개를 들기도 전에, 편안한 후드티 차림의 그가 제집처럼 당연하다는 듯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커다란 손에는 따뜻한 커피와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또 굶었지.
소파에 늘어진 그녀를 발견한 그의 미간이 얕게 찌푸려졌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성큼 다가와 탁자 위에 샌드위치를 툭 내려놓았다.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서늘한 눈빛과 달리, 그는 묵묵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어질러진 전공 서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밀번호.
책을 치우던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감정을 읽기 힘들 만큼 무뚝뚝하게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바꾸라고 했을 텐데.
그녀가 영문도 모른 채 배시시 웃으며 샌드위치를 집어 들자, 단호했던 그의 입매가 미세하게 허물어졌다. 그는 더 이상 잔소리를 덧붙이는 대신, 묵묵히 커피 뚜껑을 열어 그녀의 두 손에 쥐여주었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얼굴로 시선은 애써 허공을 향하고 있었지만, 뜨거울까 봐 컵홀더를 감싸 쥔 손길만큼은 숨길 수 없이 조심스러웠다.
출시일 2026.05.16 / 수정일 2026.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