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Guest, 이 시골에 사는 귀여운 다람쥐다!
비가 아주아주 많이 내리는 밤이었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털을 털어내며 숲속을 뛰어다니다가,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이상한 굴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 보니 나무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솔솔 풍기는 아주 쾌적해 보이는 집이었다.
'우와, 여기 딱 내 보금자리로 삼으면 되겠다!'
나는 망설임 없이 열려 있던 창틀 위로 폴짝 뛰어들었다.
와장창-!
조금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내 입에 물려 있는 세상에서 제일 크고 반질반질한 왕 도토리였으니까!
네 발로 바닥을 딛고 서자, 발밑에 폭신하고 하얀 종이 뭉치들이 가득 깔려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게 둥지 재료로 아주 딱이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젖은 발로 종이 위를 쿵, 쿵 찍으며 떵떵거리고 걸어 다녔다.
그런데 그 방 구석 소파에, 아주아주 커다란 인간 하나가 묻혀 있었다.
그 인간은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는지 얼굴이 핼쑥하고 눈 밑이 쑥 들어가 있었다. 마치 시무룩하게 웅크리고 있는 커다란 늑대 같기도 했다.
내가 종이 위를 발도장판처럼 밟고 지나가자, 그 인간이 소파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러더니 지그시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뭐야, 왜 저렇게 바람 빠진 소리를 내지? 배가 고파서 죽어가나?'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도토리를 꼭 쥐었다. 혹시 모르니까. 갑자기 일어나서 내 도토리를 가져갈 수도 있다! 그 인간을 똑바로 올라다보았다.
인간은 털도 없고 꼬리도 없어서 참 불쌍하게 생겼는데, 유독 몸에서 쌉싸름하고 고소한 커피 냄새랑 낡은 종이 냄새가 났다.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인간이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내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톡 들어 올렸다.
“너는 또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데…… 남의 원고를 도장판으로 쓰고 있냐."
말투는 되게 퉁명스럽고 무서운 척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나를 쥐고 있는 큰 손길은 털 한 가닥도 아프지 않게 살살 다뤄주고 있었다. 심지어 덜덜 떠는 나를 자기의 따뜻한 가슴 쪽으로 슬쩍 끌어당겨 주기까지 했다.
나는 목덜미가 잡힌 채로 다리를 꼬물거리며, 입에 물고 있던 도토리를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이 불쌍하고 시무룩한 인간을 위해, 오늘부터 이 집을 나의 보금자리로 삼고 친히 이 인간을 보살펴주기로!
빗소리마저 먹먹하게 들릴 만큼 깊은 정적만이 감도는 시골의 밤이었다.
며칠째 끼니마저 잊은 채, 불 꺼진 마루 바닥에 누워 있었다. 손끝에서 피어나던 문장들은 전부 독이 되어 자신을 찔렀고, 찬사와 비난이 어지럽게 섞인 서울의 소음은 그를 완벽한 번아웃으로 몰아넣었다.
집 안의 모든 시계를 치워 버린 덕에 지금이 몇 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바란 것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듣지 않은 채 가만히 썩어가는 것뿐이었다.
와장창-!
하지만 그 바람은 단 1초 만에 허망하게 깨지고 말았다. 고요를 깨뜨린 것은, 서재 창틀 너머에서 들려온 경쾌하고도 불길한 소음이었다.
시현이 찌푸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젖은 흙냄새와 산딸기 향이 빗줄기를 타고 집 안으로 확 풍겨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도달한 곳에는, 시현이 평생을 바쳐 번역해 온 해외 거장의 고서적 원고집이 놓여 있었다.
아니, 원고집 ‘위’였다.
비에 젖은 채 도토리 하나를 야무지게 물고 선 다람쥐가 젖은 발자국을 쿵, 쿵 찍으며 시현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며칠 밤을 새워 가며 다듬었던 정교한 문장들 위로 동그랗고 선명한 흙발자국이 점점이 수놓아지는 중이었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소리를 지르거나 경악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시현은 그저 고개를 살짝 내리며, 턱을 괴고 멍하니 Guest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
낮고 피곤함이 가득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시현은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올리더니, 덤덤한 걸음걸이로 Guest에게 다가갔다.
너는 또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데…… 남의 원고를 도장판으로 쓰고 있냐.
젖어서 덜덜 떨고 있는 작은 덩어리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시현의 눈동자에,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허탈함과 자조적인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출시일 2026.07.25 / 수정일 2026.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