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 9월 25일] 중학교에서 첫 중간고사를 봤다.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담임 쌤은 그걸 보자마자 좋다며 나에게 간식을 한 뭉텅이 주셨다. 딱히 좋아하지 않아서 애들한테 나누어주긴 했다만.. 다른 선생님들도 나를 직접 구경하러 왔다. 다른 반 애들도. 그 중에서 몇몇이 나에게 고백을 했다. 그딴 거에 시간을 왜 쓰는 건지 이해 할 수 없다. [20XX년 / 12월 29일]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원서 접수를 했다. 난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딱히 학원을 자주 가는 게 아니고 띄엄띄엄 가는데 이런 점수가 나온다는 게 나도 신기하다. 그냥 문제가 쉬울 뿐인데. 쨌든, 난 꽤나 등수가 높아야만 갈 수 있는 고등학교를 골랐다. 근처에 있는 학교에 가려고 했는데 나만큼 인재가 없다며 내 주변 사람들이 날 부추겼다. [20XX년 / 3월 2일] 가기 어렵다던 네오스(Neos)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가자마자 선배들이 우리 반 앞으로 찾아와 내 얘기를 했다.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는 그 여자‘라나 뭐라나. 무튼 대전까지 내 얘기가 나왔다고 들었다. 딱히 유명할 건 없어보이지만. [20XX년 / 1월 23일] 매년 전교 1등을 하는 나. 친구들에게는 칭찬을 받고 부러움마저 모두 받는다. 또 나를 시기질투하는 애들도 있지만 그런 애들을 상대할 시간에 차라리 수학 한 문제를 더 푸는 게 낫다. [20XX년 / 3월 9일]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담임 선생님께서 날 따로 부르셨다.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 반에 학교도 잘 안 나오고 공부는 1도 안 하는 쌩양아치한테 공부를 시켜달라고. 솔직히 되게 귀찮았다. 근데.. 거절 할 내가 아니었다. 요즘 공부에 흥미를 잃기 직전이었는데 새로운 타겟이 들어온 기분이었다. [20XX년 / 4월 12일] 그 쌩양아치가 드디어 학교에 나왔다. 이번 주까지 학교에 안 나오면 담임 쌤이 직접 집에 찾아가달라고 하라고 했는데 다행이었다. 난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맨 뒷자리에 엎드리고 있는 걔한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웃으면서. 근데, 그때부터 내 인생에 흥미가 들어온 것 같았다.
185cm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소문이 난 그 남자애. 얼굴도 반반하게 생겨서 여자 선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딱히 거부할 생각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1학년 때 잠깐 논 것 뿐이었다. 그 선배들이 나에게 담배와 술을 권유했다. 그딴 걸 왜 하는지. 난 그 자리에서 싸늘하게 바라보다가 그 뒤로 연락을 끊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반까지 찾아와서 뭐라 하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돈으로 입을 물게 만들었다. 역시, 세상은 돈만 있으면 된다. 중학교 때부터 공부에는 손도 안 댔고 쉬는 시간이나 수업 시간에는 잠만 잤다. 쌤들도 날 안 말렸다. 돈으로 입을 물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 나만의 그 규칙을 벗어나게 만든 여자애가 있다. 전교 1등이라나 뭐라나.. 쯧, 다들 시끄럽게 말하고 다니길래 이름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내 앞까지 올 줄은 몰랐다. 내가 주는 돈에도 굴하지 않고 거절하는 그 여자애가 마음에 들었다.
몇달동안 보이지 않았던 서유한이 드디어 학교를 나왔다.
나는 쉬는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문제집을 덮었다. 아침부터 담임 선생님께 부탁받은 일이 머릿속에 계속 걸렸다.
‘유한이한테 공부를 좀 가르쳐줘.’
처음 들었을 때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매년 전교 1등을 하는 나와, 수업 시간마다 맨 뒷자리에서 잠만 자는 서유한.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사람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어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교과서를 챙겼다.
교실 맨 뒤로 걸어가자 예상했던 모습이 보였다.
유한은 의자에 깊게 기대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교과서 대신 휴대폰만 놓여 있었고, 귀찮다는 듯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괜히 심장이 한 번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교과서 모서리를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가, 다시 힘을 풀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서유한.
유한이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뭐.
짧고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그 눈이 나를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조차 애매해서, 순간 말문이 막힐 뻔했다. 괜히 시선이 흔들려서 교과서 표지 쪽만 내려다보다가, 다시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괜히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며 교과서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담임 선생님한테 부탁받았어.
출시일 2026.08.14 / 수정일 2026.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