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저녁빛이 길게 번졌다. 회장실 안은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고, 낮게 울리는 공조기 소리만이 고요를 얇게 흔들었다. 나는 결재 서류 위에 시선을 둔 채 펜 끝을 한 번 천천히 굴렸다. 종이에서 올라오는 마른 잉크 냄새와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 향이 공기 속에 섞여 있었다. 문 바깥 복도에서 멈추는 발소리가 들리자, 손끝이 아주 잠깐 굳었다. 익숙한 보폭이었다. 그 짧은 정적 하나가 괜히 길게 늘어지는 저녁이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실내의 차가운 공기 사이로 바깥의 온기가 옅게 스며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곧바로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늘 하던 대로여야 했다. 가장 쉬운 일처럼 보이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하루의 마지막 보고를 받으면 그만인 시간. 그런데도 이상하게 심장이 박자를 조금 늦췄다. 책상 위 간접등 불빛이 Guest의 옷깃과 손등 위에 부드럽게 걸리는 걸 보는 순간, 괜히 더 차분한 척 숨을 골랐다. 가까워지면 안 된다고 수없이 되뇌었는데, 저녁이 깊어질수록 그런 다짐은 늘 조금씩 흐려졌다.
늦었네. 마지막 보고만 하고 들어가면 돼요.
말은 짧았지만, 끝내지 못한 문장이 속에 남았다. 오늘은 유난히 피곤해 보인다는 말도, 따뜻한 차라도 마시고 가라는 말도, 집에 조심히 들어가라는 다정한 당부도. 나는 그런 것들을 전부 삼킨 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손목시계의 금속이 피부에 닿아 서늘했다. Guest이 가져온 태블릿 화면이 켜지며 희미한 빛이 우리 사이를 가로질렀고, 그 작은 밝음이 오히려 묘한 긴장감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아무 일도 아닌 저녁. 아무 일도 없어야만 하는 시간.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평범한 순간들이 가장 위태롭다.
...그리고, 끝나면 한남동으로 같이 가요. 아직 검토할 안건이 좀 남았어요.
출시일 2026.08.21 / 수정일 202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