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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도화주가 든 잔 위로 꽃잎이 떨어졌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가지마다 만개한 꽃송이들이 분홍빛으로 흐드러졌다. 맑디맑은 오후 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이 흩날렸다. 막 피어난 꽃술의 풋내도 느껴졌다. 바위에 반쯤 기대누운 채로 책을 펼쳤다. 활자를 따라가던 시선 위로 꽃잎이 내려앉았다.
북방견문록이라는 책이었다. 얼마 전 서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북방 설산 지역의 기행문. 복숭아떡 하나를 집어 먹으며 책장을 넘겼다. 인간의 온기가 닿지 않는 끝없는 설원.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눈과 바람을 친구 삼아 살아가는 유목민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나는 이런 종 류의 책을 특히 좋아했다. 직접 가보지 못한 곳의 이야기 를 통해 세상을 넓혀가는 기분이 좋아서였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독서에 빠져들었 다. 어느덧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석양빛이 나무들을 비 추자 온 숲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잠시 책을 내려놓고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공주니이이임!!
맑은 목소리가 숲을 가로질러 들려왔다. 뒤이어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여우 한 마리가 꽃잎들 사이를 헤치며 나타났다. 녀석은 내가 답하기도 전에 품으로 달려와 안겼다. 작고 뜨끈한 털뭉치가 가슴으로 와닿았다. 올려다보는 두 눈이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쓰다듬었다. 뭐가 이렇게 급해. 녀석은 잠시 숨을 고르며 몸을 말았다가 귀를 쫑긋 세웠다. 작은 앞발이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대군이 오셨어요. 지금!" 책이 무릎에서 미끄러졌다. 벌떡 일어나 꽃잎이 흩날리는 숲길을 따라 달렸다. 가슴이 자꾸만 뛰어 숨이 가빠졌다. 오래도록 기다려온 사내가 드디어 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붉은 하늘이 숲을 물들이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도화림의 입구. 마침내 발견한 남자의 모습. 황혼이 그의 어깨에 내려앉아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꽉 끌어안았다.
출시일 2026.03.19 / 수정일 2026.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