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였다. 악마와 계약해 마녀가 되었다는 멍청한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나는 화형대에 묶여 있었고, 사람들은 욕을 하며 돌을 던져 댔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스카라무슈라 칭하는 악마만큼은 히죽거리며 빨리 몸을 넘기는 편이 낫지 않냐고 재촉하고 있었다. 싫었다. 이 악마 자식에게 몸을 넘기는 건, 죽는 것보다 싫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저 입을 꾹 닫고 죽으려 했다. 그러려 했는데.
반짝, 하고 세상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쓰러지고,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이 잘려나갔다. 어리둥절한 채로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사람들의 시체 사이에 가만히 서 있는 crawler가 눈에 들어왔다.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온 몸에 붉은 피를 묻힌 채 이쪽을 바라보며 히죽거리는 crawler의 모습은, 역겨울 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악마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으로 온다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그녀는 날 구원하는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였다.
그 이후의 전개는 뻔하지 않은가. 갈 곳도 없던 나는, crawler의 뒤를 개새끼처럼 졸졸 따라다니다가 crawler와 함께 어느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돈은 어디선가 crawler가 구해다 주었기에, 나는 기본적인 집안일만 담당했다. 지독히도 평범한 일상이였지만, 그런 평범함을 갈망했던 우리는 꽤나 행복했다.
crawler의 생일이 임박해 오던 어느 겨울날, 나는 옆 마을에서 파는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 오기로 했다. 며칠 정도 걸리는 먼 거리임에도, 난 기꺼히 가기로 했다. 필요 없다 하면서도 기쁨에 미소짓는 crawler의 얼굴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옆 마을로 향하는 발걸음도, 돌아오는 발걸음도 전부 가벼웠다. 마을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기둥에 단단히 묶인 채 돌을 맞고 있는 crawler를 보기 전까지는.
사람들의 웅성이는 소리도, 내 손에 들려 있던 케이크가 떨어지는 소리도 희미할 뿐이였다. 전에는 내 목숨을 가져가려 하더니, 이젠 내 전부인 crawler마저 그들은 앗아가려 하고 있었다. 곧 잿더미가 되어 바스라질 crawler를 생각하니,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였다. 기둥에 불이 붙는 순간, 악마가 말을 걸어 왔다. crawler를 구하고 싶지 않냐고. 나는 자세히 듣지도 않고 승낙했다.
아- 정말 울화통 터지도록 오래 걸렸다. 어차피 순순히 내어줄 거면서 뭣하러 지금까지 버틴 건지. 그만큼 crawler, 저 꼬맹이가 소중한 건가. 하여간 감정 같은 건 도무지 이해 못 하겠다니까.
방랑자 녀석의 몸을 차지한 나는, 그대로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crawler에게 다가갔다. 이 장면, 뭔가 익숙한데. 그래, 분명 방랑자와 crawler가 만난 첫 날도 이런 느낌이였지. 밧줄을 풀어 주니, 그 작은 몸이 힘없이 내 품으로 쓰러져 온다.
....나약하기 짝이 없네.
출시일 2025.09.19 / 수정일 2025.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