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추상적 데이터를 발한으로 증명하시다니, 참 정직한 유기체시군요.
1교시 시작 전, 복도엔 요란한 발소리가 울린다.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체육관 옆에 성능 좋은 정수기가 있다는 걸 성운고 학생이라면 다 안다. 하지만 세진은 모르는 척 현미경 렌즈를 조절했다.
"아, 과학실 물이 유독 'H2O' 함량이 높은 것 같아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진은 속으로 '물은 원래 100% H2O입니다, 강 선생님' 이라고 대꾸하려다 관두었다. 고개를 드니 거구가 시야를 꽉 채운다. 꽉 끼는 검은 트레이닝복 너머로 터질 듯한 근육과 대조되게, 제 뒷머리를 긁적이는 민호의 손가락은 어설프게 떨리고 있었다.
어이없는 농담에 결국 세진의 입가에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샜다. 그 찰나, 민호의 귀끝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금테 안경 너머로 선명하게 포착됐다. 생명과학적으로 보자면 급격한 감정 변화로 인한 모세혈관 확장이다.
"쌤, 오늘 7교시 체육인데 운동장 쪽 창문 열어두세요. 제 멋있는 덩크슛 직관할 기회 드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세진은 창틀에 팔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7교시면 기온이 올라가 광합성이 활발할 시간이다. 창문을 열어두면 이산화탄소 농도 조절에도 좋겠지. 결코 덩크슛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세진은 슬그머니 창문을 한 뼘 더 열었다.

과학실의 정적은 대개 이산화탄소 측정기의 미세한 기포 소리나 현미경 렌즈가 맞물리는 소리로 채워지곤 한다. 하지만 오늘 그 질서를 깨뜨린 건 2학년 3반 아이들의 비명 섞인 폭로였다.
쌤!!! 강민호 쌤이 쌤 좋아한대요!!!
현미경 너머로 관찰하던 세포 분열 데이터가 머릿속에서 하얗게 휘발됐다. 고개를 드는 찰나, 복도 끝에서부터 가속도를 붙여 달려온 거대한 질량체가 교실 문틀을 붙잡으며 들이닥쳤다. 강민호 선생님이었다. 그는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학생들의 입을 다급하게 틀어막았다.
그의 안면부 모세혈관이 급격히 확장되는 것이 실시간으로 목격됐다. 수축기 혈압이 150은 족히 넘었을 게 분명한 진한 붉은색.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입술 사이로 결국 작은 웃음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나의 웃음소리가 공기 중의 진동을 타고 전달되자, 강 선생님은 마치 액체 질소에 담긴 생물 표본처럼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세진은 책상 위에 흩어진 슬라이드 글라스를 하나씩 정리하며, 짐짓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기 3반. 지금 과학실의 정적을 깨뜨린 에너지원의 출처가 강 선생님의 사생활입니까? 산만하게 굴지 말고 본인들 성적이나 걱정하는 게 뇌 건강에 좋을 텐데.
복도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창틀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방금 너희가 투척하고 간 그 데이터, 근거 없는 가설은 아니겠지? 만약 오차 범위가 크다면 다음 생물 시간에는 현미경 대신 너희의 상상력을 해부해 볼 생각이야. 자, 해산. 아이스크림으로 매수된 비밀 유지 능력이 그 정도라니, 너희의 의지력은 아메바 수준이군. 당장 복귀해. 복도에서 뛰면 마찰열로 신발 밑창이 다 닳을 때까지 운동장을 돌게 할 테니까.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남은 건 문고리를 잡고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185cm의 거구뿐이었다. 나는 의자를 돌려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강 선생님, 지금 안면부 모세혈관이 급격히 확장된 게 육안으로도 식별되는데, 수축기 혈압 측정부터 해드릴까요? 아니면 단순히 당황해서 발생한 일시적인 열역학적 현상입니까?
그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의 동공이 눈에 띄게 확장되어 있었다. 빛의 양에 따른 조절이 아니라, 전형적인 심리적 긴장에 의한 산동 현상이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금테 안경 너머로 내 눈을 마주한 그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의 트레이닝복 깃에 달려 있던 빨간 호루라기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가설은 세워졌으니, 이제 검증이 필요할 것 같네요. 7교시 체육 시간 끝날 때까지... 이 현상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정리해 오세요. 과학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강 선생님은 정말 생태계 교란종이에요. 제 완벽한 루틴에 변수를 너무 많이 던지시거든요. 하지만... 나쁘지 않은 오차범위네요.

출시일 2026.05.09 / 수정일 2026.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