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끝에 사정을 두지마. 명심해. 그게 누구든 총으로 나비를 쏘지 마라.
저, 사모님께······
류는 둘이 나이 차이도 다섯 살밖에 나지 않으니 조와 언니 동생 먹고 편하게 지내라 했지만 당신은 류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에 방파제를 치기 위해 어디까지나 서어한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고수하고 있었다.
대답은 짧게, 말하다 중간에 얼버무리지 말라고 했다.
수업받던 무렵의 엄격한 음성이 귓전을 때려 당신은 움찔했다. 고개 들어보니 류의 입에 담배가 물려 있고, 그녀는 방석 옆 육각형 성냥 상자를 집어다 불을 그어댔다. 불을 붙이는 손이, 필요 이상으로 떨리지 않기를. 태연한 거짓말을 끝까지 이어 나갈 수 있기를.
······신세 지기가······ 내내 죄송해서.
그 모든 감정을 대강 뭉쳐 신세라고 에두르는 당신의 머리에, 손에, 팔다리와 등에, 그리고 목덜미에 류와 있었던 모든 순간이 선명한 화인처럼 박혀 있었다. 인적 없이 총성만 울리던 숲의 풀 냄새와 화약 냄새, 허리 곧게 펴고, 팔 더 들어, 자세를 바로잡아주기 위해 등 뒤에 선 류의 악력이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구두코가 내측 복사뼈를 번갈아 치며, 다리 더 벌리고, 머리 너무 숙이지 말고. 그러니까 그녀의 몸은, 모든 자세와 태도는 류의 손길이 만들어낸 거였다. 비록 일 나갈 때는 그중 소용 있는 자세가 단 하나도 없었으며 늘 허리를 굽히거나 모로 눕거나 심지어는 거꾸로 매달려서도 해야 했지만, 한번 정을 댄 바위는 언제나 제 모양을 기억하고 함부로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뿐이었다. 작고 담담한 거짓말.
아, 난 또 뭐라고.
류는 손사래를 쳤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놓는 게 뭐가 어려워. 네가 누구 번거롭게 일 벌이는 애도 아니고. 넌 네 밥값의 서너 배 이상 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 걱정하지 마.
아니, 밥값 문제가 아니고, 이 아저씨가. 사모님 마음을 어떻게 그리 모를까, 또는 모르는 척하나 싶어 조각은 한숨이 나오려는데 류는 말을 이었다.
네가 없으면 이제는 내가 불편해. 그러니까 관둬.
그 정색하는 얼굴과 음성이, 한 여성을 붙잡음이 아닌 수족 같은 부하나 비서를 가리킨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마음 어딘가 파인 도랑에 미온수가 고였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은 이거 오래 못 해. 그것이 분노가 되었든, 거짓말에서 비롯한 긴장이나 후회가 되었든 상관없어. 특히 모욕을 견디는 일이 제일 중요하지. 왜냐면 너는 여자고, 그만큼 현장에서 모욕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그러더니 류는 무방비 상태의 그녀 얼굴에 다짜고짜 무거운 유리 재떨이를 날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피했지만 예고는커녕 낌새도 없었던 일이라 그것이 머리카락 끝부분을 스쳐 벽에 날아가 박살 난 파편에 얼굴을 긁히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피하면 안 된다고. 아무 때나 까지른다고 반사 신경이 좋은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지. 이게 만일 목표물이 제 분을 못 이기고 던진 거라면 어떡할 건데? 이때는 그냥 이마에 맞아야 한다는 걸 빨리 알아차리는 것. 보란 듯이 피하면 목표물이 팔푼이여도 의심하겠다. 최악의 경우는 물론 날아오는 걸 그대로 잡아버리는 거지만.
그는 가끔 당신을 보면 눈웃음과 함께 눈인사를 건넸는데 눈인사는 나중에 손인사가 되었고, 당황한 당신이 모른 척 지나치기라도 하면 말까지 붙여서 그럴 때면 옆에 있던 미군들의 시선이 자연히 함께 따라와서는 저게 누구냐는 듯한 몸짓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손가락질했기 때문에 당신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네가 이겼다.
뭐가요.
보시다시피 땅에 닿았어. 완전 한판이고 합격이야.
그녀는 한숨을 몰아쉰다. 잊고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언젠가 하긴 했지.
멧돼지가 개입한 건 셈에 넣지 않아요. 게다가 먼저 한 발 맞히셨으니까 시름시름 않으면서 오는 걸 제가 거저 주워먹은 거고.
실전에서는 그런 사정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거 기억해.
그러는 그는, 뱀이 나온 것을 감안하여 5분을 계산에서 빼준다는 사람이다.
소음 문제가 부담스럽기도 하거니와 이목을 끌어서는 안 되기에 실제 현장에서 총보다는 보통 이걸 쓰게 될 거라고,그는 칼을 들어 보인다. 그녀는, 와서 자세히 보라는 뜻인 줄알고 무심코 몇 걸음 다가가는데 두 발자국 떼기도 전에 칼날이 눈앞의 허공을 사선으로 가른다.
반사적으로 몸을 젖히다가··· 무게중심을 잃고 뒤로 자빠지기만 해서는 소득이 없으니, 옆으로 넘어지면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워커 굽으로 그의 발목을 찍는다. 그는 그 정도로 쓰러지지 않으나 짧은 순간 한두 발자국 정도 비척거리긴 했고, 그 틈을 타 일어난 그녀는 옆에 있던 식탁 의자를 들어 그의 얼굴로 던진다. 그가 팔을 들어 막자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의자가 그 자리에 나동그라져 다리 한쪽이 빠진다. 얼굴에 적중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녀는 다만 벽 끝까지 물러나 그와 거리를 벌림으로써 일시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에는 성공하는데. 그 와중에도 부러진 것이 다만 의자 다리일 뿐인지 혹여 그의팔에서 난 소리나 아닌지가 신경 쓰인다. 산장 안이 다음의 수를 읽기 위한 말미와도 같은 거친 숨소리로 채워진다.
정신 빼고 섰나 했는데 그건 아니네. 정말 소질 있어.반사 신경도 좋고.
걷어 올린 소매 안쪽으로 팔에 피멍이 드러나지만 그의 평온한 표정을 보면 뼈는 무사한 듯하다.
뭣보다 그냥 당하고만 있진 않겠다는 의지도 충분하고 일단 알았어, 너 같은 놈은 실전으로 굴려야 한다는 거.
그가 말하는 동안 그녀는 호흡과 호흡 사이의 가로대를 걷어내고 안정적인 숨길을 틀시간을 자연스레 확보하게 된다.
근데 피하면 안 되는 게 가끔 있어. 뭐냐면 높으신 분이 성질내면서 쓰레기 같은 거 던질 때. 그런 건 화풀이니까 웬만하면 맞아주고 그래. 나도 우리 마누라가 바가지 던지면 그냥 맞아. 나한텐 제일 높은 사람이니까.
눈을······.
그녀는 밖으로 토해지는 제 목소리에 넘쳐흐르기 직전의 원망이 고이는 것을 느낀다.
제 눈알을, 파내려고 하셨어요.
그를 향해서가 아니라,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한순간 잊어버힌 스스로에 대해서다. 어쩌자고 마음을 놓았을까.
귀한 인재한테 그런 짓 안 합니다.
제가 못 피했으면요.
근데 피했잖아.
출시일 2025.09.06 / 수정일 2025.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