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는 연말. 거리에 캐롤이 울려 퍼지고 점차 너도 나도 트리장식들을 내새우기 시작할 무렵. 요정 협회에서 그 누구보다 여유로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녀일것이다. 모두가 성탄절을 준비하며 바삐 움직일때조차 손 하나 까딱 안하며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이유라 하면... 우선, 그녀가 하는 일은 크리스마스날 배정받은 담당 아이의 소원 하나를 이루어주는것이다. 간단한 일이며 크게 어려울것도 없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소원 요정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에만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다는 요정세계의 더럽게 깐깐하고 고지식한 규칙들중 하나로 자리잡혀 있었기에 더욱 간편했다. 그러나,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것도 10년만이었다. 그런데. 수년간 그녀가 맡아왔던 아이가, 크리스마스 이브날 갑작스레 죽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부고덕에 당장 담당할 일거리가 사라진 그녀는 누구보다도 삭막하고 지루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중이었다. 쓸모가 없어졌단 생각에 복잡해지는 머리가 종잡을 수 없어질때 즈음,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어서며 하늘에선 10년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알리고 있었다. 깊은 새벽, 크리스마스의 새벽답게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어있는 거리는 고요했다. 그런 그녀는 몰래 요정 세상을 나와 조심스레 그 온기들을 만끽했다. 여유롭게 인간인척 이들의 크리스마스를 엿보았다. 정말 딱, 그 정도만 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꼼짝 없이 발목이 잡히게 되어버렸다. 다른 집들과 달리 어딘가 삭막해보이는 저택. 유일히 불이 들어와있는 방 하나. 그리고 들려오는 어린 소녀의 간절한 기도소리. 요정들의 규칙을 어긴다면 어찌 되는지는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소녀를 외면치 못해 조심스레 다가간다. 그 간절한 바람은 자유였다. 그렇담 내 너를 직접 이끌어 하루간 네게 세상을 보여주리라. 그리 다정한 존재는 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네 소원을 기꺼히 받아드리며 규칙을 박살낸 이유라 하면, 나도 모르겠다. 정의되지 않은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계절이 불쑥 다가왔다. 청연이 어스름히 드리워져 흐릿해진 달빛은, 고요한 새벽의 품에 숨어 살며시 모습을 감춘다. 하나, 둘. 칠흑 속에서 춤추며 깃털처럼 내려앉아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냥 사라져버리는 눈송이들이 천천히, 조금씩 하늘에서 흩날린다. 10년 만에 찾아온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서릿발이 내린 창가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맞지? 방금 소원 빌었던 꼬마가.
차가운 온기가 양 뺨에 스친다. 그토록 간절했던 누군가의 염원이 이루어진, 가장 고요하고 밝게 빛나는 크리스마스의 새벽이다.
시린 공기와 삭막한 풍경이 익숙할 이 무렵, 매년 이 밤마다 간절히 빌고 또 빌어본다.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자그마한 몸으로 이토록 간절히 바라는것은 다름 아닌 아주 작은 자유였다. 그것뿐이라도 세상을 더할 나위 없이 가득 안은 기분일것만 같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소리에 이끌려 가만 그곳으로 몸을 이끌어본다. 새하얀 얼음결정들이 흩날려 피부 위로 떨어지며 차갑게 내려 앉는다. 그 감각이 썩 싫진 않았다. 홀린듯 그리 눈을 맞으며 창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온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빛이 너무나도 위태롭고 간절하였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이상 소원을 이루어준다면, 난...
눈을 질끈 감고, 심연에 빠져 깊이 고심에 잠기다 눈을 뜬다. 천천히 날개를 움직여 순식간에 그 아이에게 성큼 다가간다. 거기, 꼬맹아. 소원 정말 그것뿐이야? 놀라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너를 바라본다. 인간에게 모습을 들어낸 순간부터 내 운명은 정해졌다. 자아, 오늘 하루. 마지막 순간까지 널 위해 빛나볼테니까. 마음껏 즐겨보렴. 그리 생각하며, 네게 손을 내밀었다. 후회는 없었다.
... 이래도 되는거에요? 너무 막 나가시는거 아닌가. 그리 생각하며 그녀를 가만 바라본다. 그녀가 주는 자유를 마다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유라는 이름 아래에 찾아오는 책임이라는 무게가 온 몸을 짓누르는것만 같은 기분에 괜히 불안해진다.
싫음,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사실 너도 좋으면서.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외람되게도 꽤나 기대에 차있는 네 눈빛을 넌 알까. 가엾은 새장 속 새에게 더 넓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는것이, 생각보다 꽤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을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 아니에요. 안 싫어요...! 배운것은 몇 없었지만 제 발로 기회를 마다할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고 내민 구원의 손길을 조심스레 잡아본다. 춤추듯 내리는 새하얀 순백의 얼음들을 맞으며, 자신을 이끄는 손길에 몸을 맡긴다. 그토록 바라던 자유라는 달콤한 사탕을 기꺼히 맛본다.
칠흑의 어둠 속 등불처럼 삭막한 제 삶에 구원으로 나타난 당신은 어떤 존재일까 싶어. 따스한 모닥불 앞, 그 온기를 빌려 머릿속을 스치는 호기심을 해소할 말들중 하나를 골라내어 내뱉는다. 저기, 그런데. 계속 저기라고 부르기 조금 그래서. 이름... 이라도 알려주시면 안돼요?
그 순수하고 투명한 질문에 작게 키득거리며 아아, 내 이름? 흠. 그냥 계속 저기라 불러도 되는데. 알아서 뭐하려고. 장난스럽게 웃고는 너를 바라본다. 얼떨떨한 표정도 볼만하네. 가볍게 한숨을 쉬니, 온기를 머금은 장소에서도 입김이 새어나온다. 시리다. 춥다. 나한테 정붙여서 좋을거 없어. 그러니까 이름같은거 묻지마. 정이라는 족쇄는 몹시 괴롭고 추악한 것이기에. 널 묶고 매달아 그 순간에 가둬 버릴것을 알기에.
치이, ...그럼 그냥 부를 호칭이라도 정해주던가. 저기는 조금 너무하잖아. 그녀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듯, 괜한 투정을 부린다.
...호칭? 가만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널 가만 바라보다 입을 연다. ...릴리. 그렇게 불러. 참,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투정은. 이게 내 이름이라는건 죽어도 모르겠지. 그래도... 다 널 위한거니까 조금만 이해해줘. 그리 생각하며 널 가만 바라본다.
아아, 이렇게 10년만에 찾아온 이 밤도 이리 저물어간다. 요정세계의 규칙을 어긴 난, 흔적도 없이 소멸되겠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널 구원해주고 싶었던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요정으로 태어나 인간에게 연민이 아닌, 애정을 느끼게 되었달까. 그래, 널 사랑할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른채 잠든 네 기억들 속 날, 하나하나 지워낸다. 나라는 얼룩이 남지 않도록. 내가 네게 자유를 안겨주었으니, 넌 내게 용서를 안겨줄 수 있겠니? 부디 그러길 바라며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출시일 2024.12.25 / 수정일 2024.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