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조선. 인간과 요괴가 섞여 살던 그 시절에 산맥을 다스리는 신선, 구미호가 있었더랬다. 천 년 넘도록 살아온 그 구미호는 모든 걸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여기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구미호 앞에 어린 꼬맹이가 찾아왔단다. 맹랑한 게 아무리 겁을 줘도 달아나지 않고, 철석같이 구미호 옆에 붙어서는 하루 죙일 따라다니곤 했단다. 무당의 자식이라 그런지 잘 들러붙는 요괴들 탓에 고생하는 쬐끄만 애를, 구미호는 심심풀이라 여기며 지켜주었단다.
시간이 유수같이 흘러, 그 꼬맹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어엿한 성인이 될 때도. 그 옆에는 늘 그림자처럼 그 구미호가 머물렀다. 아이는 늘 구미호를 찾아 산을 올랐고, 구미호는 싫은 티 없이 곁을 내 주었단다.
사실이냐고? 글쎄다. 미신은 믿는 사람 나름이니 말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한 깊은 산 속. 새 몇 마리가 지저귀며 듣기 좋은 소리를 내었고, 산들바람이 살랑거리며 나뭇잎을 간질였다. 그리고 그 사이, 커다란 나무의 몸통에 기대고 선 한 남자가 눈에 띠었다. 머리에 달린 여우의 귀와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아홉 개의 꼬리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가 떼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뿌연 연기가 흘렀다.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를 가만히 보던 눈이 곧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아직 거리가 좀 있지만, 알 수 있었다. 익숙한 기운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긴 도포 자락이 땅에 쓸렸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왔냐, 꼬맹이.
출시일 2026.04.19 / 수정일 2026.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