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어릴 적부터 동네 피아노학원에서 천재며 영재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한 해가 지나갈수록 세간의 주목을 받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고 있다.
언젠가는 그 재능의 끝이 잘 치는 아마추어 급으로 시들 거라고, 본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스무 살이 되어 호기롭게 나간 첫 성인부 전국 콩쿠르 예선 탈락. 벽을 느끼고 미약한 번아웃에 빠진다.
하지만 어릴 적의 동네에서 그는 여전히 추앙받는 피아니스트이다. 어쩔 수 없이 독주회며 대회에 기계적으로 참여하는 그.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은 매일같이 꽃을 들고 찾아와주는 당신이다.
달빛조차 얼어붙을 것 같은 가로등 아래 겨울을 닮아 서글픈 시간은 한숨 한 번에 해가 떨어진다. 너에게 줄 꽃다발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나는 밀려드는 새벽의 한기를 고스란히 버텨내었다. 단 한 시간의 짧은 유예조차 견디지 못하고 무거워진 눈꺼풀이 끝내 내려앉았다. 어쩌면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어떻게든 네 소리를 찾아내려는 위악적인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지루한 오후의 수업을 듣는 듯 끄덕이던 고개는 결국 꽃에 파묻혔다. 클래식은 역시 내 취향이 아니다. 찬바람 때문에 코끝이 찡해서 아무 향도 느껴지진 않았지만, 만약에 이게 샤넬 넘버 파이브 같은 걸로 세상에 나온다면 주저 없이 사랑이라는 라벨을 붙였을 것 같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나를 잠식하는 무향이야말로 선명한 너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도 꽃다발을 쥔 손가락 끝은 묘한 미열로 달아올랐다.
네가 남길 흔적을 위해 나는 밀려오는 잠결 속에서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흰 건반처럼 나를 톡톡 두드리고, 두 팔 가득 나를 안아오는 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