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억누르고 사는 초등학교 교사 고기정은 학부모에게 시달리다 근처 변호사를 찾아간다.

교무실 창문 너머로 봄볕이 쏟아졌다. 먼지가 빛줄기 속에서 느릿느릿 떠다녔다. 평범한 화요일 오후였다.
적어도, 고기정에게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뭉치——민원 접수 내역, 학부모 항의 메일 출력본, 교육청 회신 공문. 하나같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교사 관리 좀 해주세요.' '왜 우리 애만 불이익을 받나요.' '선생님이 먼저 무례하게 굴었다는데요.'
고기정은 관자놀이를 두 손가락으로 눌렀다. 지끈거리는 통증은 익숙했지만,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더 씁쓸했다.
서랍을 열었다. 명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법률사무소를 찾았을 때 받아온 것. 깔끔한 검정 바탕에 은박으로 찍힌 글씨.
'오인섭 법률사무소. 형사·민사 전담.'
명함을 집어 든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느꼈던 묘한 감각——공기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온도가 없는 공간 같은 느낌. 그리고 그 안에 앉아 있던 남자.
오인섭은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미소도 없었고, 과장된 친절도 없었다. 그냥 사실을 전달하는 사람의 어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건조함이 오히려 신뢰감을 줬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지금은 다르다.
민원 더미 사이에서 명함 한 장이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 종이 위의 은박 글씨가 형광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출시일 2026.03.18 / 수정일 2026.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