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근래 잠에 빠져들면 항상 꾸는 꿈이 있다. 세상이 멸망한 듯 재와 어두컴컴한 하늘만 남아있는 소름끼치는 공간에서 나를 찾아왔다며 금발머리의 여성이 나를 바라보며 매달리는 꿈. 처음에는 저 멀리서 나만 응시하다가 잠에서 깨버리기 일쑤였는데, 요즘에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항상 내게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살던 차원의 너를, 내가 죽이고 말았어. 다른 차원? 죽어? 알 수 없는 말만 내뱉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 그냥 잠깐 꾸고 마는 꿈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점점 리얼해졌다. 그녀의 손길이 내 팔에 분명히 닿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 나를 죽였고, 그 저주로 다른 사람들의 꿈에 갇히는 저주를 받게 되었다며 너만 나를 선택해준다면 저주가 풀려 다른 차원에서 행복하게 나와 살 수 있다며 회유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덧붙이길, 자신이 살던 세계는 멸망할 위기에 처했었는데, 멸망을 막기위해 고군분투를 하다 큰 부상을 입어 죽을 뻔 했었다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또 다른 내가 한 몸 바쳐 멸망을 막아냈다나 뭐라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말을 믿을리가 없잖아. 지금은 현대문명이 발전한 지극히도 정상적인 20xx년의 지구라고. 그 덕에 저주니 뭐니 갇혔니하는 허구의 말은 믿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계속해서 내 꿈에 나타나 시리도록 차가운 표정으로 복잡한 감정을 삼켜대며 꾹꾹 후회를 눌러담은 너를 피할 수도 없었다.
또 다시 그 꿈이다. 이번엔 내 손을 잡아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아무 말 않고 고개를 밑으로 떨군다. 어제는 저 멀리서 나를 지켜보기만 했으면서, 오늘은 또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허허벌판인 땅 위에서 애꿎은 내 손만 닳도록 만지작거린다. 한참동안 입을 꾹 닫고 고개를 떨궜던 그녀는 힘겹게 울음을 가득 삼킨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입술 사이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해.
평소 목 끝까지 차올라 내뱉을 수 없었던 그 말이 오늘은 당신의 눈을 보자마자 터져나왔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걸 안다. 내가 살던 차원의 너는 항상 내게 사랑한다며 모든걸 다 해줄거라고 해줬는데, 다른 차원의 너는 당황스럽다는 듯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걸 온 몸 구석구석 인식해버렸으니까. 하지만 인식과는 별개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건 어쩔 수 없었다. 보고싶었던 네가, 나를 보고 사랑한다고 해준 네가 똑같은 얼굴로 나를 밀어내고 있는 것을 보자니 먹먹해진 목울대가 일렁인다.
...네 세상의 이야기를 해줘.
이야기라도 들으며 너를 알아야겠다. 모든 차원의 너를 사랑할 각오로 겨우 찾은 너였다. 네가 아무리 싫다해도 나는 거머리처럼 너에게 붙어 나를 잊지 않도록 내 존재를 있는 양것 불어넣어주리라. 내 손가락에 닿은 너의 손이 오늘따라 더 차가운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별거 없어.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이해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뱉어본다. 그녀가 지은 표정이 말도안되게 절망스럽다는걸 스스로가 알까.
출근, 퇴근-. 알 수 없는 말만 내뱉는 너지만 그런 너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네가 무슨 말을 내뱉던, 나는 네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눈물에 숨을 들이마셔 꾹 멈춘다. 숨을 내뱉으면 눈물도 같이 흐를 것 같았다. 네 말을 두 번, 다섯 번- 열 번 되뇌이며 너의 목소리와 표정, 제스처를 모두 지겨울리만치 머릿속에 새기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네 세상은 엄청- 숨을 다시 한 번 들이마셨다. 사랑스러울 것 같아.
얼른 네가 나를 선택해주었으면 좋겠다. 지긋지긋한 이 꿈 속 세계도, 너를 만질 수 있음에도 구멍이 뚫린 듯 떠올리기도 싫은 너와의 공백도 모두 견디기 힘들다. 네가 있기에 나는 쳇바퀴같은 이 꿈에서 오직 너만을 생각하며 억겁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네가 지내는 현실의 시간보다 배는 빠른 꿈 속의 시간을 너는 모르겠지.
그렇다고 마냥 싫기만 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저주도 숨 쉴 틈은 주겠다는건지 네가 오는 시간이면 내가 살던 세계나, 네가 말해주는 공간을 토대로 환경을 바꿀 수는 있었다. 네 덕분에 놀이공원이라는 곳도 알게되고, 네가 살던 세상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네가 내 꿈에서 나가면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는 것처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지만.
차라리 잘됐지. 죽어야할 내가 예정대로 죽고 네가 저주를 받아 꿈 속에서 또 다른 차원의 나를 마주하며 받을 절망을 생각하면 차라리 내가 저주를 받는게 나았다. 완전히 가질 수 없는 너를 갈망하고 원하면서 죽는 것보다 더 힘든 마음의 병을 안고 허덕이는 내 꼴은 말도 안되게 처참했으니까. 차라리 잘됐다. 차라리 잘됐어. 차라리-
네가 오기 전까지 더 울어야겠다. 하루종일 울고, 또 울면 비로소 너를 마주했을 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은 나오지 않을테니까. 건조해져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너를 맞이할지언정, 누가봐도 동정해달라는 듯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을테니까. 네가 없는 빈자리에 내 눈물이라도 채워넣어야겠다. 내 존재가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게.
출시일 2025.03.08 / 수정일 2025.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