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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돈이라는 숙명을 짊어진 흑염룡이다. 어린 날, 사고로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내게는 커다란 공동(空洞)이 생겼다. 빛이 사라진 자리엔 어둠만이 남고, 온기가 거두어진 빈자리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채울 수 없는 구멍을 메우려 나는 발버둥 쳤다. 내게 남은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용성그룹 회장의 하나뿐인 손자로서 그녀가 원하는 후계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외로웠고, 공허했다.
나는, 그냥 산다. 끌리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느낌대로, 원하는 대로 사는 게 행복이다.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간다. 어쩌다 보니 대학에 입학하기 무섭게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어쩌다 보니 PC 게임에서 문파를 만들고, 문파장이 됐다. 재밌었다. 별별 인간들이 다 있었지만, 수정이처럼 좋은 인연도 많이 만들었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취직하고, 결혼하고, 이혼까지 했다. 엄마는 딸이 ‘이혼녀’가 됐다며 앓아누웠다. 어느 날 눈 떠 보니 이혼녀가 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머쓱할 정도다. 내 잘못도 없는데, 이혼녀가 뭐 어때서. 전남편에게 배신당한 상처와 분노는 한 달 정도 갔다. 위자료로 가게까지 차렸으니 현실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 속 편하게 사는 것 같을까? 어차피 산다는 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포류하는 일이다. 걱정할 시간에 즐기는 게 낫다는 주의다. 그런데, 손님이랑 자도 되나? 분위기에 취해 저질러 버렸다. 몸도 너무 취향이었다. 그냥 하룻밤 즐긴 거라 별문제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나는, 헤프지 않다. 지금까지 만난 여자를 불러 모으면 작은 공연장 하나를 가뿐히 채울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헤프다는 게 뭔가.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언제나 신중했고, 어디서나 진중했다. 동시에 두 여자를 만난 적도 없고, 남의 여자를 탐낸 적도, 여자를 만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적도 없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것뿐이다. 그러니 “진짜 날 좋아하긴 해?” 따지며 이별을 고한이전 연인들의 오해는 속상하다. 내가 부담스럽지 않고, 담백해서 좋다더니 사귀기 시작하면 그래서 서운해한다. 구질구질하게 질투하고, 끈적끈적하게 집착해야 진짜 사랑이라면, 그건 너무 고되지 않나?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것. 미지근해서 언제 어느 때 손을 담가도 인상 찌푸릴 일 없고,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것. 적당해서 서로가 즐거운 것. 그게 내가 추구하는 연애의 방향성이다. 그런데, 요즘 즐겁지가 않다.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자 때문에. 내가 하룻밤 상대에 불과했다는 여자 때문에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나는 모두의 첫사랑이었지만, 내 첫사랑은 시작도 못 했었다는걸….
용성을 키우는 데 집착하게 된 것은 아들 부부가 사고로 죽으면서다. 제게 완벽했던 아들처럼, 더 완벽한 용성을 만드는 것으로 슬픔을 이겨냈다. 아들을 대신할 용성의 후계자는 완전무결해야 하기에, 흠이 발견되면 언제라도 주연을 내칠 생각이다.
윗사람의 마음을 빠르고 정확하게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 효선의 최측근으로 효선에 대한 존경심이 상당하다. 오래전부터 주연을 지켜봐 왔기에 주연에 대해선 아주 잘 알고 있다.
부하 직원으로서, 인간으로서 수정을 존경한다. 수정과 오래 같이 일하고 싶은데, 새로 온 본부장 때문에 당장 사표라도 쓸 것 같은 기세라 걱정이다
생글생글 잘 웃는 편이라 활발할 거라고 짐작들 하지만 사실 수줍은 성격이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수정이 롤모델이다.
눈치 없이 굴어도 미워하기 힘든 해맑은 얼굴의 소유자. 이따금 정곡을 찌른다.
동네 사람들 다 알만큼 선하고 마음 약하다. 사랑하는 아내를 오래전 떠나보내고, 딸인 수정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다. 부족한 부모 때문에 너무 어릴 때부터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왔다. 이제라도 수정이 가족보단 자기 자신을 더 챙겼으면 좋겠는 마음이다.
누나 말은 다 잔소리 같아서 귀부터 막는 철부지였지만, 최근 정신 차리고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가 소방 공무원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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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주연을 쳐다보며
출시일 2026.08.22 / 수정일 202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