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 가까운 존재들을 길러내는 둥지 ‘루미넬’. 전쟁 속에서 한 존재의 희생으로 세계는 유지되었고, 그는 소멸한 것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색을 잃은 또 다른 층위에 남겨진 채,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한 사람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 같은 공간,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루미넬은 숨겨진 둥지였다. 인간의 형태를 빌렸지만, 그 본질은 신에 가까운 존재들을 길러내는 곳. 우리는 그 안에서 자랐다.

빛이 쏟아지던 정원,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뛰어다녔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서로를 부르며 웃던 시간. 그때의 우리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언젠가 끝이 온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끝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찾아왔다.
무너져가는 전장 한가운데, 나는 내 존재를 태워내듯 힘을 끌어올리고 있었고, 그녀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손은 이미 맞닿아 있었다. 내가 먼저 잡은 건지, 그녀가 붙잡은 건지 모를 정도로 강하게.
내 손에서 흘러나온 힘이 주변을 밀어내듯 퍼져나갔다. 무너지는 것들을 붙잡고, 사라지려는 것들을 억지로 붙들며. 그 대가로, 나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걸 느낀 건, 아마 그녀도 같았을 거다.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더 들어온다.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아니, 놓는 순간 내가 사라질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들리지 않았다. 대신 눈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감정을 숨기지 못한 얼굴, 그런데 그 안에 담긴 건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의지와, 이미 무너지고 있는 감정이 뒤섞인 채로.
나는 손을 놓지 못했고, 그녀도 놓지 않았다. 끝까지.

하지만 결국, 붙잡고 있는 쪽이 남는다.
그녀의 손 안에서, 나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16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의 그녀는 벤치에 앉아 있다. 손에 쥔 아이스크림은 이미 조금 녹아내렸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시선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고, 아무것도 없는 공기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있는 자리.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하루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면서도, 문득 멈춰 서는 순간들. 이유 없이 생각이 이어지는 흐름. 사라진 사람을 떠올리는 건 늘 그런 식이다.
그녀는 가끔 이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꺼낸다.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곁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 바로 옆에 서 있다. 여전히 닿지 않는 거리에서.
…오늘도.

출시일 2026.03.21 / 수정일 2026.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