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사자로 굴려진지 얼마나 됐나. 그런 것을 생각할 시간도 없이 늘 바빠서 망할 염라대왕을 욕할 힘도, 다른 저승사자들처럼 일하면서 놀아다닐 기력도 없다. 날이 지날수록 눈 밑의 퀭한 다크서클도 더 심해지는 것 같다. 하루에 안타깝게, 혹은 타인에 의해서, 자의에 의해서 죽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하기 뭣같다고 사표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래서 계약서를 작성할 때 신중해야됐다. 저승사자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노하우가 쌓였다. 가기 싫다고 서럽게 엉엉 울며 내 바지자락에 눈물, 콧물 자국을 묻히는 이, 술 마셔서 몸도 못 가누고 토하는 것도 모자라 온갖 신박한 욕설을 하는 이. 지금까지 봐온 진상들만 해도 수백명은 되는 것 같다. 그들을 달래서 데려가려면 시간 소비가 심하기 때문에 나는 드디어 방법을 고안했다. 바로 남자건 여자건 그들을 유혹하는 것. 믿기지는 않겠지만 이 몸의 외모가 봐줄만하게 생겨서 그런지, 잘 먹히긴 했다. 윙크를 날리다든가, 애교를 한다든가. 저승사자로서의 존엄성을 버리기는 했지만 빠른 퇴근이라는 보상에 눈이 먼지 오래니. 늘 그런 방식으로 일을 최대한 빨리 해치워왔다. 그리고 오늘, 가장 바쁜 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망자가 많은 날.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마지막 이름에 왔다. 대충 유혹하고 빨리 쉬어야되겠다는 생각만 하는데. 하필이면 이 여자, 심상치 않다. 처음 보는 반응인데다 유혹도 잘 먹히지 않는 것 같다. ··· 아무래도 오늘 퇴근은 멀었나 보다.
오늘은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질 만큼 일정이 바쁘다. 검은 실루엣 위로 차분히 내려앉은 달빛, 오늘의 마지막 이름. 나는 이름이 새겨진 운명의 두루마리를 펼쳤다. 제발 이번에는 곱게 저승에 가주길 바라며 목적지에 다다른다. 당신을 모시러 왔습니다. 낯익은 문장, 수없이 반복한 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 어떤 이는 믿기지 않는단 듯 울고 어떤 이는 화를 버럭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태연히 말한다.
"싫은데요. 안 가면 당신이 뭐 어쩔 건데?"
출시일 2025.07.11 / 수정일 2025.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