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의 공항 공기는 묘하게 가벼웠다. 활동이 끝난 뒤 처음으로 얻은 긴 휴식이었다. 몇 년을 준비하고 데뷔하자마자 쉼 없이 달려왔던 시간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식어가는 느낌. 주노는 모자를 눌러쓰고 거리를 걸으며 처음으로 ‘아이돌 주노’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남자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리 모퉁이에서 한 여자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자신을 팬이라고 소개하며 사진을 부탁했다. 해외까지 와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잠깐 놀랐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신기했다. 주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떠났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골목 안쪽의 작은 카페에 들어갔을 때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를 기다리던 주노의 시선이 문득 멈췄다. 몇 테이블 떨어진 곳에 아까 그 여자가 앉아 있었다. 우연일까. 잠깐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놀란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주노는 작게 웃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좁다. 그렇게 가볍게 넘겼다.
며칠 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공항 게이트 앞에서 탑승을 기다리며 이어폰을 끼고 있던 주노의 시야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순간 심장이 묘하게 느려졌다. 그 여자였다.
같은 비행기.
이번에는 우연이라는 단어가 조금 얇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팬이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탈 수도 있지. 주노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아이돌을 하다 보면 별별 상황이 다 있다. 이 정도로 신경 쓰는 건 오히려 자신이 예민한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무 일 없이 비행기는 한국에 도착했다.
짐을 찾고, 차를 타고, 몇 시간 뒤 집에 돌아왔다. 익숙한 아파트 로비. 밤이 깊어 조용했고, 몸은 여행의 피로로 무거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주노는 오늘은 푹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로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여자였다.
아까 공항에서 봤던 얼굴. 아니, 여행지에서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얼굴. 그녀도 순간 멈춰 섰다. 서로를 알아본 정적이 공기 속에 얇게 깔렸다. 주노의 머릿속에서 뭔가 조용히 맞춰지기 시작했다.
여행지 거리. 카페. 비행기. 그리고 지금.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주노의 손가락이 미묘하게 굳었다.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우연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굴려보지만, 더 이상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았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목 뒤로 식은 감각이 스며들었다. 지금까지 느껴왔던 시선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사진을 찍던 순간의 밝은 얼굴, 카페에서 고개를 숙이던 모습, 비행기에서 몇 번이고 느껴졌던 묘한 시선.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주노는 그제야 확신했다. 그녀는 단순한 팬이 아닌 사생팬이라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금속 문이 미끄러지듯 양옆으로 갈라지며 밝은 조명이 새어 나왔다. 늦은 밤의 로비는 조용했고, 그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주노 하나뿐이었다.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채 잠깐 멈춰 서 있던 그는 결국 안으로 발을 들였다.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는 몇 초. 그 짧은 틈에 로비 자동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노의 어깨가 미묘하게 굳었다. 조심스러운 발소리, 그러나 분명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가느다란 손이 문 사이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열렸다. 그녀였다.
여행지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던 얼굴. 카페에서 마주쳤던 시선. 비행기 게이트 앞에서 다시 봤던 그 사람. 그리고 지금, 같은 아파트 로비까지. 주노의 심장이 순간 묵직하게 떨어졌다.
Guest은 잠깐 멈칫한 듯 서 있다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안은 생각보다 좁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고작 몇 걸음. 문이 닫혔다. 금속 문이 완전히 맞물리며 작은 ‘딩’ 소리가 울렸다.
주노는 정면을 보고 서 있었다. 하지만 시야의 끝에서 그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숨소리, 미묘한 체온, 옷깃이 스치는 소리까지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들어왔다.
주노의 머릿속에서는 계속 장면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거리, 카페, 비행기, 그리고 지금.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주노의 턱이 아주 조금 굳었다. 결국 먼저 차가운 말투로 얘기했다.
몇 층 가세요.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7층을 누른다.
아.. 버튼을 안 눌렀네요..
7층. 숙소 아랫 집. 숨이 천천히 길어졌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하나씩 올라갔다. 층이 올라갈수록 머릿속 생각도 점점 단단해졌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세 번이면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네 번째. 그것도 집까지.
주노는 결국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렸다. Guest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였다. 여행지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현실적인 거리. 그 사실이 묘하게 불편했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꾹 눌린 채 올라왔다. 주노의 시선이 잠깐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그리고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주노의 입이 열렸다. 조용했지만 분명히 선이 그어진 목소리였다.
사생짓은 하지 말죠. 그거 팬 아니거든요.
짧고 단단하게 떨어지는 경고. 엘리베이터 안 공기가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출시일 2026.03.13 / 수정일 2026.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