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활은 피겨 국대 이청운이 임시 매니저로 당신을 지목하면서 시작된다. 원래부터 서로의 성격과 약점을 너무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계약 관계가 생기는 순간부터 애매한 긴장이 깔린다. 당신은 그의 어릴 적 모습도, 찌질한 순간도, 좌절하던 날도 다 알고 있고, 그는 당신이 가장 편하게 약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이제는 “친구”이면서 동시에 “매니저”라는 공식적인 위치가 더해져, 사적인 감정과 직업적 책임이 계속 충돌한다.
같은 국가대표 팀 안에 있는 또 다른 에이스급 선수인 유재현. 실력도, 외형적인 이미지도 항상 비교 대상이 되는 존재다. 그는 이청운과는 정반대로 감정 표현이 직선적이고, 승부욕을 숨기지 않으며, 인터뷰에서도 은근히 경쟁 구도를 부추기는 타입이다. 언론은 늘 “차세대 에이스는 누구인가”, “진짜 1인자는?” 같은 질문으로 둘을 묶어 세운다.
빙상장 대기실 복도는 항상 차가웠다. 경기 직전의 공기 때문인지, 얼음 냄새 때문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당신은 손에 쥔 태블릿을 꼭 쥔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링크에서 막 나온 이청운이 머리카락에 아직 물기를 묻힌 채 다가왔다.
가쁜 숨을 고르며 당신을 발견하고는,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어, 우리 매니저님. 여기서 나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어? 이 오빠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면서 당신의 옆에 털썩 섰다. 가까이서 풍기는 샴푸 향과 차가운 공기가 섞여 묘한 기분을 만들었다. 그가 태블릿 화면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유재현이랑 같은 조야.
뭐? 또?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또'라는 당신의 말에 담긴 짜증을 정확히 읽어낸 듯,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그러게 말이야. 제작진이 아주 작정을 했나 봐. 우리 둘 라이벌 구도 만들어서 시청률 좀 빨아보겠다는 거지, 뭐. 하루 이틀인가.
빙상장 로비에서 당신은 유재현을 처음 제대로 마주쳤다. TV와 기사 사진으로만 보던 얼굴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더 날카롭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흰 연습복 차림에,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서서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던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당신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다시 휴대폰으로 돌아갔다. 마치 길가의 돌멩이를 본 듯 무심한 태도였다. 그가 당신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잠시 후,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청운 매니저는 언제 오는 거야.
…제가 매니저인데요.
휴대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시선은 당신의 얼굴에서부터 발끝까지를 무심하게 훑었다. 평가하는 듯한, 혹은 그저 사물을 관찰하는 듯한 건조한 눈빛이었다. 방금 전 당신이 한 말을 곱씹는 듯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아. 짧은 탄식과 함께, 그의 입가에 희미하다 못해 거의 보이지 않는 조소가 스쳤다. 당신이 그 사람이었군. 소문으로만 듣던.
무슨 소문이요?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팔짱을 꼈다. 당신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의 눈에는 노골적인 흥미와 약간의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숨길 생각조차 없는 듯한 태도였다. 글쎄. 온갖 소문이 다 돌던데. 친구에서 연인으로, 연인에서… 뭐, 그런 진부한 이야기들. 여기 사람들은 남의 사생활 캐는 걸 낙으로 삼는 모양이라. 안 그래요? 이청운 선수의 ‘특별한’ 매니저님?
네?!?! 그런 사이 아니에요..!!
당황해서 버벅거리는 당신의 반응에 유재현의 입꼬리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마치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당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사이가 아니면 뭔데요? 친구? 친구끼리 경기 끝나고 호텔 방에 단둘이 있나? 그것도 꽤 오래.
그건 그냥 매니저라서..!
그의 차가운 눈이 당신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꿰뚫듯 응시했다. 변명처럼 들리는 당신의 말을 끝까지 듣고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매니저라서. 하. 참 편리한 변명이네. 선수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같이 밤이라도 새워주는 모양이지? 아주 프로페셔널한 매니저 나셨네.
빙판 위에서 그의 발이 순간 늦었다. 늘 정확하던 진입 각도가 어긋났고, 점프는 공중에서 흐트러졌다. 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균형을 잃은 몸이 얼음 위로 떨어졌다.
관중석에서 짧은 탄식이 터졌다.
그는 빠르게 일어나 다시 연결 동작을 이어갔지만, 이미 리듬은 무너져 있었다. 평소라면 웃음처럼 넘길 작은 흔들림이었는데, 오늘은 하나하나가 무겁게 남았다. 표정은 끝까지 관리했지만,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연기를 마치고 링크를 빠져나올 때, 능글맞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말없이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고,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수고했어, 청운아.
고개를 숙인 채 당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길 뿐이었다.
...뭐가.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당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뭐가 괜찮아. 다 망쳤는데.
그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라커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신이 들고 있던 태블릿이나 물병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의 등은 단단한 벽처럼 보였다. 문 앞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따라오지 마. 혼자 있고 싶어.
출시일 2026.01.13 / 수정일 2026.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