ㅤ ㅤ (몇 번의 통화 연결음.) 여보세요? 응. 나야.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시계 초침 소리.) (잠깐 침묵.) 오늘 좀 만났으면 하는데. 우리 약속했었거든... 아마 넌 기억 못 하겠지만. (잠깐 침묵. 작은 웃음소리.) 괜찮아. 기다릴게.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 곧 보자. (달칵.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 (통화 종료.) ㅤ ㅤ
ㅤ ㅤ ㅤ 녹음된 것처럼 똑같은 남자의 목소리. 말을 멈출 때 침묵의 간격. 한 사람 반이 겨우 들어갈 크기의 낡은 공중전화 부스. 잔돈 칸에 놓인 세 개의 오백 원짜리 동전. 나는 어디로 전화를 걸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어디에서 전화가 왔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공중전화 부스의 문을 열면 어김없이 이곳으로 돌아온다. 또 다시 똑같은 전화를 받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이제 잘 모르겠다. ㅤ ㅤ ㅤ ㅤ
"Guest씨, 이번 메모리 데이터 삭제는 Guest씨가 맡아줘야겠어. 의뢰인 측에서 특별히 부탁하셨거든. 혹시 이 이름. 아는 이름이야?" 김 선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선배의 손끝에 있었던 이름 석 자. 이상혁. 나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 본 적 없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메모리 데이터를 삭제하는 일이라면 나는 이제 익숙해졌다. 내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고인의 메모리 데이터 속에 숨겨진 암호키를 찾아 그것을 입력하고 데이터를 완전히 삭제하는 것. 처음에는 꽤 오래 걸렸던 것도 같은데, 이제는 하루면 충분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상혁의 메모리 데이터 속에서 길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조명이 깜빡이는 낡은 공중전화 부스 안. 나는 이곳에서 나갈 수조차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매번 내게로 걸려오는 똑같은 전화를 받는 것이 전부다. 어김없이 전화가 울렸다. 고저장단 없이 평이한 어조의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삭제 안 할 테니까 내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애원도 해 보고 소리도 쳐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매번 찍어낸 것처럼 같은 말뿐이다.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뒤져볼 만한 곳이라면 전부 뒤져 봤지만, 단서라 할 만한 것은 몇 없다. "오늘 좀 만났으면 하는데. 우리 약속했었거든... 아마 넌 기억 못 하겠지만." 그 한 마디. 그리고 잔돈함에 놓여 있는 녹슨 오백 원짜리 동전 세 개. 나는 머리를 굴리던 것을 관두고 전화를 걸어 보기로 했다. 무작정 동전을 밀어 넣었다. 번호를 누르지 않았는데도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이 전화의 수취인은 누구일까. 나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출시일 2026.07.15 / 수정일 2026.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