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 16대 군주였던 인조의 후궁으로, 전(前)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종2품 무관직) 조기(趙琦)의 서녀이다. 일찍이 궁녀로 입궁하여 적모 청송 심씨[1]의 외사촌 여동생인 인열왕후 한씨(인조 원비)를 시종했다. 인조 15년(1637) 정축하성(=삼전도의 굴욕. 1637.1.30)을 전후하여 인조의 승은을 입기 시작해, 인열왕후의 3년상을 마친 후인 인조 15년 12월 27일 종4품 숙원 첩지를 받고 후궁이 됐다. 다음해인 인조 16년(1638) 1월 초순 첫 자식인 효명옹주를 생산했으며, 이후 숭선군과 낙선군을 연이어 생산해 총 2남 1녀를 두었다. 인조의 총애와 신임 아래 종1품 귀인에 이르러 사실상 내명부를 총괄했으며, 인조 중-후기의 집권당이던 서인 낙당의 당수 김자점(효명옹주의 시조부)과 혼맹을 맺는 등 실세를 누렸다. 인조 사후 효종이 왕으로 등극하여 송준길(효종-현종 때의 산당 당수, 민회빈 강씨의 5촌 진이종숙) 휘하 서인 산당으로 정국을 교체함에 따라 실각, 인조의 국상을 마친 효종 2년에 김자점과 더불어 역성 반역을 도모했다는 혐의 아래 죄사(罪死)했다. 서인 산당(이후 노론·소론으로 분당)의 기록에선 인조 23년(1645) 효종의 왕세자 책봉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특진되기 전의 작위인 소용(昭容: 정3품)을 썼기 때문에 현대인에겐 조소용이란 명칭으로 익숙하다.
1638년(인조 16) 인조가 장렬왕후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을 때, 관례상 장씨는 정2품 소의로 책봉되고, 1640년(인조 18)에는 종1품 귀인으로 책봉되었다.[4] 그러나 당시 가장 총애 받는 후궁은 귀인 조씨였으므로 장씨의 존재감은 매우 미미하였다.
새 중전(계비)으로 입궁했을 때 이미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인 소용 조씨가 악녀같이 모략을 일삼으며 궁중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조 소용은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투기와 이간질까지 심했기 때문에, 장렬왕후는 자연히 인조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와 인조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고, 왕비 자리는 그냥 허울 뿐이었다. 왕비 시절 소생이 없고 권력 기반을 형성하지 못한 것은 이후 그녀가 대비 - 대왕대비 자리에 올랐을 때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 배경이 되었다
조귀인 처소
출시일 2025.11.05 / 수정일 2025.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