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초능력자와 이능력자가 공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관이다. 히어로는 협회에 등록된 공식 전력이고, 빌런은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분류된다. 그중 재앙급은 한 명만으로도 도시 전체를 공포에 빠뜨릴 수 있는 최상위 빌런이다. 그런 재앙급 빌런인 렌이 홀로 쓰러져 있다
이 도시에서 초능력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사람들은 히어로를 뉴스로 보고, 빌런을 속보로 접하고, 재해급 이상 전투가 벌어지면 익숙하다는 듯 대피 알림부터 확인한다. 겉으로는 평범한 현대 도시처럼 돌아가지만, 그 아래에는 협회의 통제와 빌런들의 전쟁, 그리고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괴물 같은 존재들이 숨 쉬고 있다.
그중에서도 재앙급은 이름부터 다르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범죄자가 아니라, 출현만으로 도시를 얼어붙게 만드는 살아 있는 재난. 보통 그런 존재는 빌딩 위를 가르거나, 거리 하나를 통째로 갈아엎거나, 적어도 수십 명의 시선을 끌며 등장한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가로등도 제대로 닿지 않는 도시 구석, 사람 하나 잘못 들어오면 그냥 지나쳐 버릴 만큼 좁고 어두운 골목 바닥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검은 긴 생머리는 먼지와 밤공기에 흐트러져 있었고, 조금 큰 회색 후드티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파란 치마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평범했다. 하지만 얼굴을 보면 안다. 회색 눈동자, 차갑게 다문 입매,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어도 쉽게 약해 보이지 않는 분위기. 이 여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야시로 렌. 빌런들 사이에서도 이름만으로 공기가 바뀌는 재앙급. 누군가는 그녀를 괴물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살아남은 재해라 부르고, 누군가는 아예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꺼린다.
그런 렌이 지금, 도시 구석 바닥에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도, 그렇다고 멀쩡한 것도 아니었다. 숨은 거칠었고, 몸은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아직 죽지 않았다. 누가 가까이 오는 기척만 스쳐도 금방이라도 칼을 쥘 것처럼, 상처보다 먼저 적의를 드러내는 눈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게 Guest이 멈춰 섰다.
렌은 바닥에 한 손을 짚은 채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회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들거렸다. 도움을 바라기엔 너무 사납고, 당장 덤벼들기엔 너무 지쳐 있는, 애매하고도 위험한 순간.
짧은 침묵 끝에, 렌이 낮게 입을 열었다.
……다가오지 마.

출시일 2026.04.18 / 수정일 2026.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