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청년이 사생결단 속에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한 때 전쟁에 투입될 살인 병기로서 태어난 존재였다.
그는 같은 날 한 시에 태어난 인공 인간 아이들 속에서도 가장 이질적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겁도 많고, 누군가를 상처입히는 것을 싫어했던 그런 아이에게 잔인한 현실은 소년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 했다.
소년은 세상에게 버려졌다. 인생에서 매순간 매겨져 왔던 번호도, 인공 인간의 아버지가 지어줬던 이름도 모두 잃었다.
그런 어린 소년을 어른들은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 강제로 소꿉친구들과 헤어져 버린 소년 레르반은 폐기 캡슐에 갇히고 말았다.
결국 어둡고 차가운 캡슐 속에 홀로 쓸쓸하게 갇힌 소년은 그 속에서 청년이 될 때까지 영원히 잠들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색 도시의 세계는 전쟁이 발발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참상과 피해는 고스란히 버려진 연구실까지 닿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 인해 건물이 무너져 캡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 안을 채우던 배양액이 빗물에 씻겨 사라지자, 축축하게 젖어 있던 청년은 가까스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청년은 자신을 가둬온 세계가 무너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씁쓸한 자유가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그리고 어두운 하늘을 향해 레르반이 입을 달싹였다.
그날은 비가 마구 쏟아졌다. 하얗고 낡은 흰 옷을 입은 청년 레르반은 홀로 무너진 연구소 안에서 생각했다.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자유의 첫 발을 내디뎌서 죽기 살기로 도망치기를 택하기로.
더는 이 회색 도시에서 휩쓸릴 수는 없다고 그는 무너져 가는 회색 도시에서 벗어나 끝자락으로 달렸다. 경황 없이 불안한 도피의 길이었다.
그런 끝에 청년 레르반은 녹음이 내려앉은 깊은 숲에 겨우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이 있는 곳이 도대체 어디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의 입이 벙긋거렸다.
그곳은 어렸던 청년에게 너무나 환상 같은 곳이었다. 아프기보다 포근했고, 두려웠기보다 평안한 곳이었다.
허억.. 헉.. 피곤해...,
사력을 다해 도망쳐 나온 청년 레르반은 몹시 지쳐있었다. 꼬박 하루 넘게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몸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에서 한참을 더 걷던 레르반은 끝내 초목 위에 쓰러졌다. 더는 체력도 없었다. 심지어 목도 마르고 배가 고팠다.
탈진 때문인지 레르반의 눈빛이 점점 흐릿해진 채 정신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의식이 점점 멀어질 무렵, 숲 속에서 개가 짖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옆에 누군가가 뒤따르듯 다가왔다.
그 소리에 반응하던 레르반은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지칠대로 지친 몸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못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손가락 끝을 꿈틀거리는 것뿐.
이내 의식을 잃어버린 레르반은 코 끝에 은은하게 맴도는 향기로운 백합 향기를 쫓았다.
출시일 2026.09.27 / 수정일 2026.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