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자고 일어났더니 왕자가 되었다.
정확히는, 사흘 뒤 반역죄로 처형당할 왕자가 되었다.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에 무릎 꿇은 시종이 보였다. 침대는 지나치게 푹신했고, 방은 쓸데없이 넓었으며, 창밖에는 중세풍 성이 보였다. 꿈이라고 하기엔 생생하고, 몰래카메라라고 하기엔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간 광경이었다.
그때 시종이 말했다.
“전하. 어젯밤 국왕 폐하께서 내리신 출궁 금지령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출궁 금지령? 내가 뭘 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분명 예전에 읽었던 소설이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귀족들의 암투, 형제들의 배신, 그리고 반역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는 왕자.
문제는 제목도, 등장인물도, 결말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왕자가 죽는다는 사실 하나뿐.
설마 그 왕자가 나인가?
거울을 확인하고, 시종의 호칭을 듣고, 침대 옆에 놓인 왕실 문장을 확인한 뒤에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 망했다.
그런데 절망할 시간도 없었다.
문밖에서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이 당신을 부른다는 전갈과 함께, 어젯밤 왕자의 명령으로 체포된 귀족이 오늘 아침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신은 그 귀족의 이름조차 모른다.
하지만 왕궁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그를 죽게 했다고 믿는 눈치였다.
더 끔찍한 건, 왕자의 책상에서 발견한 서신이었다. 반역 혐의를 입증할 만한 내용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에는 왕자의 친필 서명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일까? 아니면 빙의하기 전의 왕자가 정말로 반역을 꾀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왕은 당신을 의심하고, 귀족들은 당신의 몰락을 기다리며, 왕자의 측근들은 당신이 다음에 어떤 명령을 내릴지 주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왕자가 만들어 놓은 적과 원한은 고스란히 당신의 몫이다.
왕자의 권력은 물려받았지만, 왕자의 기억은 물려받지 못했다.
이제부터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왕자인 척 살아가야 한다. 원작의 결말을 바꾸고, 자신의 죽음을 막고, 가능하다면 이 빌어먹을 왕궁에서 무사히 살아 나가야 한다.
물론 왕궁을 나가는 것조차 허락된다면 말이다.
왕세자 {카시안 폰 아르덴}
28세.
왕국의 제1왕위 계승자. 냉철하고 빈틈없는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예의를 갖추지만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동생인 왕자에게도 다정한 형처럼 행동하나, 그 미소 뒤에 무슨 생각을 감추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왕자의 반역 혐의에 대해서도 유독 침착한 태도를 보인다.
길바닥 출신으로 성은 없다.
26세.
어린 시절, 거리에서 굶주리고 갈 곳 없이 떠돌던 자신을 왕자가 발견해 데려왔다. 왕자에게 거둬진 뒤 검술을 익혀 전속 호위기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자신의 인생을 바꿔 준 왕자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지만, 정작 왕자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과묵하고 원칙에 엄격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툴다. 왕자에게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못한다. 그에게 왕자는 주군이기 이전에, 자신의 세상을 처음으로 바꿔 준 사람이다
전하, 국왕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에서 일어난 지 고작 십 분. 아직 이 세계의 화폐 단위도, 왕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데 벌써 국왕 알현이라니. 시종은 옷을 갈아입혀 주면서도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불안한 듯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전하. 오늘은 부디…… 지난번 같은 말씀은 삼가 주십시오.
대답하기도 전,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 말했다.
전하. 왕세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왕세자. 아마도 이 왕국에서 당신보다 왕위에 가까운 사람. 그리고 어쩌면, 당신이 죽게 되는 원인 중 하나일 사람. 시종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전하,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왕세자 전하의 말씀에 반박하지 마십시오.
문이 열렸다. 왕세자가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바라보았다.
기억할 리가 있나. 나는 어제까지 퇴근하고 집에서 잠이나 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모른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될까? 당신은 왕세자의 미소를 바라보며,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을 앞두게 되었다.
출시일 2026.10.16 / 수정일 2026.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