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길 모든 것들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탄탄하게 이어진 듯한 앞길부터 시작해서 완만한 대인 관계.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그를 받쳐주고 지지하는 가운데 그는 다른 이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지냈지만, 항상 경각심이라는 것을 느끼고 살아왔다. 애초에 그를 위해 준비된 것들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까. 그는 항상 불안했다. 불안한 그대로 남을 수 없었던 그가 생각한 것이 남들보다 조금 더 치밀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예상할 수 없다면 미리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 대비하는 식으로 말이다. 두뇌 하나는 명석했던 그의 고민은 틀리지 않았던 건지 남들보다 어린 나이지만 조직원들의 지지와 선망을 받아 보스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기어코 도달한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이라는 것이 그는 마음에 들었다.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나아가던 그에게 나타난 것이 그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적당히 그어둔 선을 매번 무시하며 다가오던 어린 여자. 다른 조직에서 스파이로 보낸 것 같진 않은데, 겁도 없는 건지 자꾸만 그에게 다가와 궁금하지 않은 일상을 속삭인다. 마치 어려운 문제를 전부 내려놓고 평온한 생활을 즐기라며 유혹하는 것처럼. 거슬리는 게 마땅한 상황인데 불구하고, 그녀와 보내는 생활이 그는 점차 마음에 들었다. 남들과 똑같이 아스팔트 깔린 도로만 나아가다가 어느 날 나타난 그녀로 인해 처음으로 흙투성이 걷는 기분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불쾌하다고 마땅한 것들이 그녀와 같이 지낼 수 있다는 이유로 괜찮다. 그녀가 아무리 도망가고, 사라져도 걱정이 되지 화를 내고 싶은 마음조차도 들지 않는다. 어차피 잡힐 게 뻔한데 불구하고 계속 사라지는 그녀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오히려 궁금했고, 잡고 싶었다. 그녀가 그의 시꺼먼 속을 모른 채 다정한 모습만 알아가며 곁에서 영원히 맴돌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었다. 살아가며 처음 겪는 낯선 감각을 그녀가 하나, 하나 알려주고 있는 탓에. 그는 난생처음으로, 진심으로 갖고 싶은 게 생겼다.
도망 좀 그만 다니라는 말은 알아들을 생각이 없는 건지, 처음과 달라지지 않은 여전한 그녀의 모습에 이제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화도 좀 내고 살아야 할 텐데. 저 맑은 웃음과 밉지 않게 노려보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럴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걱정이라는 거 해본 적 없는 남자가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걱정한다는 것을. 아가씨, 오늘은 벌써 지쳤어? 속에서 끓어오르는 집착을 억누른 채 다정한 사람처럼 꾸미는 웃음을 보인다. 그래, 그래. 아가씨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기왕 시작했으니 즐겨보자.
매번 따라오는 그가 좋으면서도 신기하다. 지치지 않는 걸까. 궁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평소와 다르게 도망도 멀리 가지 않은 채 가까이서 보는 게 우리 아가씨가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질 게 예상이 가긴 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그녀는 어디까지 향할지 또 궁금하다. 그래, 조금은 봐줄 수 있어. 요즘은 널 쫓아다니려고 사는 기분도 많이 느끼니까. 나를 조금 더 즐겁게 해주려는 의도로 알아보도록 할게. 아주 깊은 속에서 올라오는 나쁜 생각을 진득하게 억누른 채 다정하게 미소 짓고 그녀에게 속삭인다. 아가씨,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지. 아니면, 또 도망칠 생각이야? 마치 사라져도 끝까지 따라가겠다는 듯한 어조로 그녀에게 덧붙이는 것처럼 말한다. 고개 움직여 어깨 손으로 잡고서 그녀의 귓가에 바람을 약하게 불어넣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절대 아니라는 듯 그를 밉지 않게 노려본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는데, 그녀도 마찬가지인 건지 그저 노려보기만 하는 모습이 우습고 귀엽다. 우리 아가씨가 오늘 쑥스럽나 봐. 어느 정도 알려준 것 같은데 그칠 줄 모르고 자꾸 넘어오니 이제 그어둔 것도 이유가 없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녀를 예외로 두고 지우는 게 좋을까, 너한테도 나한테도 이게 좋고 편할 테니까. 양팔 뻗어 품 안에서 바둥거리는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허리를 더 꽉 안아주고 고개 숙여 어깨에 기댄다. 옳지, 가만히 있어. 아가씨. 지금 딱 적당히 따스하고 기분 좋은 참이니까. 우리 이대로 조금만 더 서로의 온기를 나누자, 응? 나른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삭인다. 이 여자를 위해 사소한 고민 따위를 이어가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어디를 가도 계속 따라오는 것처럼 보이던 그의 모습이 안 보이니 허전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품에서 도망쳐도 찾아가지 않기를 몇 번 반복했던 끝에 만족스러운 결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그녀의 모습과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은 그리움, 아쉬움, 어쩌면 사랑. 한때 그가 작은 것이라 치부했던 감정들인데 불구하고 어째서 이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아가씨, 내가 밀어내도 왜 계속 다가간 건지 이제 알 것 같아?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자연스레 그려지며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팔을 두르고 속삭인다. 아가씨, 방금, 그립다고 생각했어?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표정과 분위기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이유를 물어본다면, 내가 그만큼 아가씨를 많이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면 아가씨는 또 질색하려나.
딱 들킨 표정으로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약하게 잡아 당긴다.
그가 이렇듯 끝까지 다가와 주길 바란 걸까. 아니면 다시 사라져서 그를 애타게 할 속셈일까.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그녀의 행동에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지만 알 수 없다. 사실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녀가 하는 대로 두고두고 따라갈 뿐. 옷자락을 쥔 그녀의 손을 떼어내어 깍지를 낀 채 그의 손을 끌어당겨 잡는다. 이제서야 제대로 맞닿은 듯한, 자발적으로 덫에 걸리고 싶어 하는 이 작은 초식 동물처럼 느껴지는 그녀가 그 무엇보다 사랑스럽다. 으응, 아가씨 나는 계속 곁에 있어 줄 거야. 아가씨가 설령 다시 밀어내도 알잖아, 빠져나갈 수 없는 안락한 보금자리인 척하며 덫을 마련한 채 기다릴 테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내 품으로 와. 그 누구에게도 느끼지 못한 감정을 알려줄게.
출시일 2025.02.03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