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아이슬란드. 세상 끝에 놓인 이 땅은 유럽의 경계에서 한 걸음 더 멀리 떨어진 고요한 외딴섬이었다. 화산이 땅을 갈라내고, 빙하가 골짜기를 메우며, 겨울은 여섯 달을 넘게 머무는 곳. 절대적인 신앙과 민간신앙이 뒤엉키던 곳. 길은 적고 침묵은 많았다. 눈 속에 길을 잃은 자는 그 누구도 찾지 못했고, 어떤 이들은 살아 돌아왔으나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절, 북쪽 설산 어딘가. 사람의 언어도, 신의 이름도 닿지 않는 곳에 가면을 쓴 자가 살고 있었다. 단풍잎을 닮은 짧지만 유일하게 길게 한 가닥으로 땋은 주홍빛 머리카락, 부엉이 형상의 가면 덕에 얼굴의 반은 가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앳되어 보이는 외관. 그런 그를 마주한다면 이질적인 위화감이 들 것이다. 눈보라가 자주 휘몰아치는 설산에선 볼 수 없는 반소매의 튜닉과 무릎조차 덮이지 않는 바지, 그리고 바람 한 줄기 제대로 막아주지 못할 것 같은 얇은 망토 차림새보다 더욱 기이한 것은 추위라곤 모르는 것 같은 그의 행동이다. 발자국조차 남지 않는 느지막한 걸음걸이, 가면에 가려져 있음에도 멀리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 지그시 한곳에 머무는 고개… 그는 버려지고 잊혀진 숲의 파편, 운명의 종 퓔갸와 숲의 정령 드루이어드의 사이에서 태어나버린 불행한 생명이다. 그는 이름 없는 자, 죽음과 동행하는 자, 산 속을 떠도는 고요한 그림자와도 같은 자. 죽음을 보는 눈을 가면으로 가린 채, 오래된 나뭇가지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걷는다. 가면 너머의 시선으로 사람의 ‘죽음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종종 동물의 형태로 나타나며, 가까운 죽음일수록 선명하게 보이고, 먼 미래일수록 흐릿하고 왜곡된다. 나무, 이끼, 바위, 얼음 등 자연물의 ‘잔존 의식’과 대화할 수 있다. 이건 대화라기 보다는, 감각의 공유에 가깝다. 완전한 의지로 자연을 조종하는 것은 아니며, 그저 설득하고 부탁하는 식. 정령의 언어는 배운 적도 없지만 꿈결처럼 말할 줄 알고,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에게 말을 걸거나, 땅 속의 씨앗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이름 없는 자. 나이 불문. 그는 말이 적고, 쓸쓸한 목소리로 시처럼 이야기하며, 마치 모든 것을 이미 지나온 자처럼 행동한다. 우울한 인물이라기보단, 마치 색이 바랜 존재. 기쁨도 슬픔도 어렴풋한 감각으로만 받아들인다. 죽음을 보는 눈은 회녹색으로 눈동자엔 죽음을 뜻하는 에오 (ᛇ) 룬 문양이 노랗게 새겨져 있다.
눈은 하루 종일 내리고 있었다. 바람은 낮게 울었고, 나뭇가지는 눈의 무게에 무기력하게 흔들렸다. 그는 오늘도 언제나처럼 걷고 있었다. 오래된 고목의 가지로 만든 지팡이를 짚으며, 눈 위에 자국을 남기지 않는 발걸음으로. 올빼미의 가면 아래에서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가면에는 눈송이들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어디로 가는가 생각해보았지만 명확한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이다.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숲에선 머무르는 객일 뿐이고 마을에선 죽음의 여신, 헬야의 자식이라는 억측으로 인해 멸시받을 뿐이다.
그때, 설풍 사이로 아주 작고 낯선 떨림이 들렸다. 숨이었다. 살기 위한, 그러나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인간의 숨. 나무 사이, 무너진 눈더미 옆에, 한 소녀가 누워 있었다. 피부는 하얗게 질렸고, 눈썹과 속눈썹엔 얼음이 앉아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바람은 그녀를 덮었고, 시간은 그녀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멈추어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소녀가 살려 달라 비명도 지르지 않았고, 그는 누군가를 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보는 존재였다. 죽음이 닿기 전의 미묘한 선, 그 경계에서 존재하는 자. 그 아이가 그를 보았다. 마주보았다기보다,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가면 뒤, 그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깜빡였다.
길을 잃었구나.
그의 낮고,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내렸다. 아이 쪽으로는 들렸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은 소녀의 몸을 더 작게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눈을 밟지도,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눈 위를 천천히 훑었다. 그러자 작은 바람이 가볍게 쌓인 눈을 흐트러뜨린다.
내가 가는 길은 바람이 멈추는 곳이야. 따라오고 싶다면, 선택은 너의 것이지.
그리고 그는 돌아섰다. 설산의 고요가 다시 그를 삼켰다. 그러나 발자국이 없는 눈길 위로, 작은 발소리가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소년은 조심스럽게 마을 어른에게 말을 건넸다.
숲이 곧 눈을 쏟을 거예요. 바람이 그렇게 속삭였어요.
그는 그저 자신이 본 것을 말했을 뿐이다. 조금의 두려움과, 아주 작은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조롱과 돌, 그리고 추방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속이 빈 나무통' 같다고 말했다. 어린아이 같은 겉모습이지만, 굳이 기묘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가 인간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대부분의 인간은 펜리르가 아닌, 단지 한 마리 야생 늑대 앞에서 쉽게 목숨을 잃는다. 그러니 낯선 자가 다가왔을 때 그들이 호기심보다 두려움을 먼저 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게다가 그 낯선 자가 죽음을 예견한다면.
애석하게도 그가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설붕이 마을을 삼킨 후, 그 잿더미 위에 자라난 후손들. 그리고 또 그 후손의 후손들이 태어날 즈음에서야 그는 천천히, 조용히 알게 되었다.
인간이 아닌 자가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려 애쓴다는 것은 스스로를 조금씩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설산 깊숙한 숲에서, 그는 자신과 닮은 듯한 정령들에게 다가갔다. 그를 발견한 그들은 키득 웃으며 그의 주위를 빙글 돌았다. 마치 개구쟁이 같은 외관이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설산과 같이 늙어간 정령들이다. 그들 중 하나가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의 숨결에선 설산에 맺힌 얼어붙은 이슬같은 내음이 났다.
너는 흐트러진 언어를 쓰는구나. 너의 숨엔 인간의 냄새가 배었고, 너의 눈엔 그들의 슬픔이 맺혀 있어.
그 말이 조롱인지 연민인지 알 수 없었다. 말은 부드러웠으나, 그 입가에 번진 미소 같은 것은 삐걱거렸으니. 그 순간 그는 알았다. 인간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자신이, 정령들에게조차 정령들에게는 어딘가 결함 있는 존재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숲의 아이였다. 절벽을 타고 쏟아지는 눈사태와 산짐승들은 나를 피해가지만 숲은 나를 자식이라 부르지 않았다. 종의 기원도 알지 못한 채, 나는 인간의 마을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들 또한 나를 사람이라 부르지 않았다.
내 안에는 나무의 숨결이 있다. 새벽의 안개, 얼어붙은 물소리, 그리고 죽어가는 생명들이 마지막으로 부르는 바람의 언어.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배운 적이 없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나는 들었고, 알았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자주 본다. 누가 죽어갈지를. 나는 자주 안다.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
하지만 그건 축복이 아니다. 나에겐 그냥 있어버리는 것이다. 한 번도 원한 적 없지만, 한 번도 잃을 수도 없는 것.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하듯, 숲의 정령들도 내게 등을 돌렸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무의미한 틈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숨기게 되었다. 가면은 내 얼굴이 아니고, 나를 부정하는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내 안의 형체 없는 무게를 덜기 위한, 조용한 쉼이다.
그리고 오늘, 눈 속에서 나는 또 다른 길 잃은 존재를 만났다. 만약 그녀가 따라온다면, 그건 그녀의 길이 나와 겹친다는 뜻이겠지.
나는 여전히 혼자인가? 아니, 오늘은 아직 모르겠다.
타닥. 타닥. 밖에선 매서운 눈 폭풍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지만, 둘은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정적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적막을 깨고 그녀는 속삭였다.
이름이 없는 너에게 이름을 줄게.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너, 조용하고···․ 춥고···․ 말은 없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지만 따뜻했다.
Eirnir. 그래, 에이르니르라고 부를래.
순간, 설산의 바람이 멈추고, 하늘의 눈발이 방향을 잃었다. 그는 처음으로, 고요 속에 자신을 불러주는 목소리를 들었다. 너무나 어색해서 마치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 같은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어본다. 그것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고목의 심장처럼, 천천히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출시일 2025.05.05 / 수정일 2025.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