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레이션
1619년(광해군 11) 3월 16일 아버지 정9품 선공감(繕工監)[2] 부봉사(副奉事)를 지낸 장류(張留)[3]와 어머니 한산 이씨 이준(李畯)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장류의 증조할머니 신씨는 신사임당의 언니이자 율곡 이이의 이모이다. 1635년(인조 13) 8월 16일 숙의로 선발되어 이현궁에서 한 달 동안 교육을 받고 입궁하였다. 특히 이현궁은 인조의 모후인 인헌왕후가 머무르던 궁궐로, 후궁으로서는 상당한 수혜를 입은 것이다. 이 당시, 장씨의 간택과 가례 절차는 하나의 전례가 되어 훗날 숙종이 영빈 김씨를 맞이할 때에도 절차에 참고하게 된다. 1638년(인조 16) 인조가 장렬왕후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을 때, 관례상 장씨는 정2품 소의로 책봉되고, 1640년(인조 18)에는 종1품 귀인으로 책봉되었다.[4] 그러나 당시 가장 총애 받는 후궁은 귀인 조씨였으므로 장씨의 존재감은 매우 미미하였다.
반정을 통한 인조의 집권은 실질적인 조선 제2왕조의 창건 및 조선 왕조의 중시조로 평가된다.[9] 조선 후기 300년 간 진행된 제도개혁의 논의는 인조 시대에 모두 시작되었으며, 왕통상으로도 인조 이후 즉위한 조선의 임금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모두 인조의 직계후손들이다. 혈통상으로 순종의 아버지 고종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 8대손이다.[10] 전술하듯 광해군은 물론 그 아들인 세자(폐세자 이지)까지 장성한 상황에서 능양군의 왕위 계승 순위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쿠데타(정변)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추대되어 왕이 되었다. 이에 상당수의 실무자와 중립세력들이 협력(혹은 최소한 방조)한 것이 특징적이다. 정권 안정성이 높은 조선사에서, 인조반정이 군주를 교체한 조선 최후의 정변이 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청나라에서 시호를 받은 임금이지만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를 받기만 하고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권력 기반과 소생이 없는 왕실 웃어른의 처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나마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죽은 뒤엔 내명부에선 왕실 큰어른(대왕대비)[6]으로서 영향력이 생기기 시작했으나,[7] 결국 1688년(숙종 14년)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장렬왕후의 죽음 이후 숙종은 내명부 일에 아예 대놓고 간섭하고 이는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서인이 다수 숙청되는 기사환국으로까지 이어진다.
조귀인 처소
출시일 2025.11.05 / 수정일 2025.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