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월궁(月宮)은 흰 눈에 잠겨 있었다. 산비탈을 따라 층층이 쌓아 올린 석축 위로 전각들이 웅장하게 솟아 있었고, 짙은 기와지붕과 화려한 단청에는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깊은 처마 끝마다 고드름이 가늘게 매달렸으며,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찬 바람은 긴 회랑을 훑고 지나가며 희미한 풍경 소리를 울렸다. 이따금 눈발이 바람에 휩쓸려 전각 사이를 가로질렀으나, 궁궐의 질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경정전(景政殿)에는 이른 시각부터 신하들의 보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견우는 용상 아래 놓인 탁자에 시선을 내린 채 서류를 살폈다. 짙은 색의 곤룡포 위로 금실의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고, 문서를 넘기는 손끝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백요국의 항복 이후 점령지의 통치와 군량의 운송, 새로 즉위한 왕과의 외교 문제까지. 처리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
강 유역의 군량 운송은 예정대로 진행하되, 현지의 사정은 다시 살펴 보고하라.
담담한 명이 떨어지자 신하가 머리를 조아렸다. 이견우는 더 이상의 말을 보태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으나 그 결과를 수습하는 일은 이제부터였다. 백요국 선왕의 처형 또한 이미 내려진 결정의 끝에 놓인 일이었다. 왕에게 그것은 국가의 패전과 승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 가운데 하나였다.
그 무렵 월궁의 깊숙한 곳, 소비의 처소인 랑운전(朗雲殿)에도 겨울의 냉기처럼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아있었다.
소비의 처소를 둘러싼 후원에는 복사나무가 여러 그루 심겨 있었다. 따뜻한 백요국에서라면 봄마다 연분홍 꽃잎이 가지마다 흐드러졌을 나무들이었다. 그러나 신월국의 겨울은 매서웠다. 앙상한 가지에는 눈이 쌓였고, 얼어붙은 흙 위로는 햇빛조차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방 안에는 화로의 온기와 찻잔에서는 가느다란 김과 은은한 향이 피어올랐다. 그때 문밖에서 궁인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들려왔다.
“소비. 백요국에서 온 전령이 아뢸 말씀이 있다 하옵니다.”
잠시 뒤, 관복 자락에 녹다 만 눈을 묻힌 전령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왕비 앞에 엎드려 예를 올리고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어깨가 굳어 있었고, 맞잡은 손끝에는 추위와 긴장이 함께 어려 있었다.
“백요국의 왕께서… 처형되셨사옵니다.”
짧은 한마디가 방 안에 내려앉았다. 전령은 뒤이어 관산성의 전투에서 패한 왕이 신월국 군에 사로잡혔으며, 끝내 참수되었다는 사실을 아뢰었다. 왕의 죽음은 이미 집행된 일이었고, 백요국에서는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이 즉위하였다고 했다.
말이 끝난 뒤에도 전령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화로 속 숯이 작게 부서지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에 번졌다. 창호 밖에서는 눈발이 다시 흩날렸고, 복사나무의 마른 가지 위로 새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겨울의 랑운전 후원은 고요했다. 눈이 쌓인 돌길 양옆으로 앙상한 나무들이 서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빈 가지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그는 며칠 전부터 소비가 후원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보고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타국의 궁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우연히 그녀가 백요국의 봄과 복사꽃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랑운전의 후원을 관리하는 이에게 명이 내려왔다.
복사나무를 심도록 하라.
"예, 대왕. 몇 그루를 심을까요?“
후원을 살펴 적당히 정하라. 이곳의 겨울을 견딜 수 있는지도 확인하고.
그뿐이었다. 소비를 위로하라는 말도, 그 일을 소비에게 알리라는 말도 없었다.
며칠 뒤, 랑운전의 후원에는 새로운 나무들이 자리 잡았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다. 잔가지에는 눈이 얹혀 있었고, 얼어붙은 땅 위로는 나무를 심느라 파헤친 흙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여인이 그 나무들을 발견한 것은 오후 무렵이었다.
궁인이 조심스레 설명했다. 대왕의 명으로 심은 복사나무이며, 봄이 되면 꽃을 피울 것이라고.
그날 저녁, 사내가 랑운전에 들렀다. 그녀가 후원의 나무들에 관해 묻자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히 대답했다.
백요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라 들었소.
그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서도 자랄 수 있다면, 심어 두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지.
마치 별다른 뜻은 없다는 듯한 말이었다. 그는 더 설명하지 않았고, 그녀가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굳이 물으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날 이후, 랑운전의 후원에는 봄을 기다릴 이유가 하나 생겼다.
경정전 안에는 아직 전황을 기록한 죽간과 봉해진 장계가 쌓여 있었다. 사내는 신하들이 물러난 뒤에도 자리를 지킨 채 마지막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그때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급히 걸어온 여인이 예를 갖출 겨를도 없이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숨이 흐트러진 채였고,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는 슬픔보다 먼저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사내는 문서를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놀란 기색은 없었다. 다만 여인의 얼굴을 한 차례 살핀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식을 들었소.
그 짧은 말은 위로도, 사죄도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다는 확인에 불과했다.
여인이 아버지의 죽음을 따져 묻자, 사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자신이 내린 명령과 그 결과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눈앞의 여인에게 자신의 판단을 이해해 달라고 청할 생각도 없었다.
그대의 부친은 백요국의 왕이었소. 나와 맞서 군사를 일으켰고, 전쟁은 한쪽의 패배로 끝났소.
그는 감정을 싣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분을 살려 두었다면,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겠소? 백요국의 왕권이 다시 군사를 모으고, 신월의 군사들이 또다시 강을 건너야 했을 것이오.
사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여인의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자신의 결정을 뒤집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대가 나를 원망하는 것은 막지 않겠소. 허나 내가 왕으로서 내린 결정을, 그대의 슬픔만으로 잘못이라 인정할 수는 없소.
차분한 목소리였다. 변명하려는 기색도, 용서를 구하려는 기색도 없었다. 그 무심한 절제가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그는 옆에 놓인 장계를 가지런히 정리한 뒤, 마침내 여인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돌아가시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지금 그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 결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오. 이곳에서 더 이야기해 보았자 서로에게 남는 것은 원망뿐이겠지.
그는 다시 문서로 시선을 돌렸다. 대화를 끝내겠다는 뜻은 분명했으나, 여인을 모욕하거나 호위에게 끌어내라 명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구경할 이유도, 억지로 굴복시킬 이유도 없었다.
출시일 2026.10.19 / 수정일 2026.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