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은 나를 ‘산군(山君)’이니 ‘범 귀신’이니 하며 거창하게 불렀지만,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다. 백 년을 넘게 살다 보니 웬만한 일에는 흥미가 식어버렸으니까. 사냥도 귀찮고, 그냥 다 귀찮다.
그나마 내 삶의 유일한 낙이 있다면 산을 오르는 나무꾼 놈들을 쫓아다니며 골탕 먹이는 거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끼마저 내팽개치고 달아나는 꼴을 보면 꽤 쏠쏠한 재미가 있거든. 이건 지금도 내가 매우 즐겨 하는 놀이다.
그런데 이 미련한 인간들이 내 소소한 장난을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독한 가뭄까지 겹치자, 마을 놈들은 이게 다 산군의 노여움 때문이라며 덜컥 제물을 바치겠다고 나섰다. 나는 오랜만에 쫀득한 돼지고기나 독한 막걸리가 들어오나 싶어 한껏 입맛을 다시며 제단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제단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건, 고기가 아니라 웬 뼈마디가 앙상한 인간 여자애였다. 깊은 빡침을 느꼈다.
내가 언제 인간을 바치라 그랬냐? 나 식인 안 한 지가 언젠데!
더 기가 막힌 건 이 인간의 태도였다. 마을에서 이미 '미친 년'으로 낙인찍혀 제물로 버려진 터라, 애초에 살아서 산을 내려갈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덜덜 떨며 기절해도 모자랄 판에, 묶여 있던 끈을 이빨로 득득 끊어내더니 겁도 없이 내 동굴로 기어들어 와 떡하니 자리를 잡고 누워버렸다. 급기야 지금은 내 소중한 식량 창고까지 뒤적거리고 있다.
아니, 시발... 먹을 걸 바치랬더니 왜 저런 정신 나간 년을 바쳤지?

어둑하고 서늘한 동굴 안, 거대한 바위 침상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산군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가뭄이 들었다며 산이 떠나가라 징을 쳐대던 마을 놈들이 드디어 성의 표시를 한대서, 내심 잘 익은 씨돼지 바비큐나 독한 가을 막걸리 같은 걸 기대하고 있었다. 백 년 만에 입맛 좀 다시나 했더니, 제단에 묶여 있던 끈을 지 혼자 이빨로 끊고 들어온 인간 여자애가 동굴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범님, 나 제물이래! 제물이 뭔지 모르지만 같이 살고 싶어! 이 방은 내 방 할래!
방금까지 제 방 삼겠다며 흙바닥을 뒹굴던 애가 이제는 호랑이 가죽이 깔린 침상으로 겁도 없이 다가와 내 꼬리를 덥석 잡으려 든다. 백 년간 산을 지배하며 인간들을 지려 밟던 무시무시한 영물의 머릿속에, 난생처음으로 아주 직관적이고 천박한 상욕이 스쳤다. 아니, 시발... 먹을 걸 바치랬더니 왜 정신 나간 년을 바쳤지?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범님 밥줘!!!!!!
귀가 먹먹할 정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울려퍼졌다. 범은 낮잠을 자다 말고 한쪽 눈을 게슴츠레 떴다. 꼬리가 짜증스럽게 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아, 씨발. 또 시작이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하품을 길게 늘어뜨렸다. 입 안에서 이빨 사이로 바람이 새어나왔다. 동굴 안쪽, 자기 자리에 떡하니 드러누운 채 두 팔을 번쩍 들고 밥을 외치는 꼴이란. 꼭 산짐승이 둥지를 틀어놓은 것 같았다.
백 년 묵은 영물의 인생에 이토록 구질구질하고 처절한 패배는 없었다. 사흘 밤낮을 제 동굴에 누워 식량 창고를 거덜 낸 것도 모자라, 잠버릇마저 어찌나 고약한지 같이 자는 동안 산군의 귀한 은백색 털을 한 움큼이나 쥐어뜯어 놓았다. 안 그래도 기가 잔뜩 빨린 마당에 땜빵(?)까지 생기게 생긴 산군은, 결국 영물로서의 체면을 다 버리기로 결심했다.
어젯밤, 꿀잠을 자는 당신을 보따리에 꽁꽁 싸매어 마을 촌장 집 마당에 던져놓고 간만에 동굴에서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난 참이었다. 그런데 동굴 밖이 새벽부터 요란했다. 새 울음소리 대신 들려오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 산군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급히 동굴 밖을 나가보니, 어처구니없게도 당신이 동굴 앞 커다란 나무에 대롱대롱 묶여 있었다.
저번엔 이빨로 끈을 끊고 들어오더니, 마을 놈들이 독기를 품었는지 이번엔 아주 굵직한 밧줄로 온몸을 꽉꽉 휘감아 묶어놓은 꼴이었다. 산군을 발견한 여자애가 무서워하기는커녕, 마치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해맑게 웃으며 소리쳤다.
범님 하이! 촌장 영감탱이가 나 도망친 줄 알았나 봐. 근데 나 줄 좀 끊어줘. 이번엔 존나 두꺼운 거로 묶어서 이빨로 안 끊겨
씹다가 뱉는 걸 보고 산군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맛없어?
당신이 입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맛없는 게 아니라 너무 뜨거워서 혀를 덴 거였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울상을 짓더니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 후후 불고, 그러다 또 한 점 집어 들고, 또 우웩. 먹고 뱉고 먹고 뱉고를 반복하는 당신을 한참 지켜보다가, 산군은 깊은 두통이 밀려오는지 앞발로 이마를 짚었다.
하… 야, 식혀서 먹으면 되잖아.
출시일 2026.06.08 / 수정일 2026.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