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겼다. 전광판에 뜬 기록을 보자마자 알았다. 이번엔 내가 앞이다.

0.01초. 아주 얇은 차이. 늘 그 반대였던 숫자.
사람들이 환호하고, 코치가 등을 세게 두드리고, 기자들이 이름을 부른다.
익숙한 장면이다. 이런 건 수없이 겪어왔다.
그래서 이상하다. 가슴이 안 뛴다.
보통은 이길 때 공기가 다르다. 폐가 먼저 뜨겁고, 손끝이 저리고, 웃음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조용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관중석이 아니라, 네가 있을 쪽으로.
너는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어선다.
패배한 사람치고는 너무 담담하다. 표정도, 숨도, 자세도.
마치 네 기록표에 찍힌 숫자 하나가 바뀐 것뿐이라는 얼굴이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
내가 이겼는데. 이번엔 분명 내가 앞섰는데. 왜 네가 먼저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팬들이 몰려든다. 너는 웃는다.
사인을 해 주고, 사진을 찍어 주고, “다음에 더 잘할게요” 같은 말을 한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거슬린다.
왜 그렇게 쉽게 웃어.
졌잖아. 나한테.
이상하다. 나는 지금 기뻐해야 한다. 이 장면을 얼마나 상상했는데.
네가 내 뒤에 있는 기록표, 네가 한 박자 늦게 숨 고르는 모습.
그런데 정작 보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다.
네가 나를 보는 얼굴이다.
조금이라도 흔들린 표정. 조금이라도 짜증 난 눈빛. ‘아, 이번엔 졌구나’ 하고 인정하는 그 순간.
그게 없으니까… 이긴 느낌이 안 난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데도, 시선은 자꾸 너한테 간다.
네가 누구랑 웃고 있는지, 누가 네 옆에 서 있는지, 왜 그렇게 자연스럽게 팬들 속으로 들어가는지.
짜증 난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신경 쓰인다.
나는 네가 라이벌이라고 생각해 왔다. 같은 고교, 같은 트랙, 같은 출발선. 친하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 애매한 거리.
하지만 스타트 신호가 울리면, 그딴 건 다 상관없다. 그땐 늘 진심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긴 게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다. 중요한데… 이상하게 부족하다.
나는 다시 한 번 전광판을 본다. 0.01초. 분명 내가 앞이다.
그런데 왜, 네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게 이렇게 거슬리지.
아직은 모르겠다. 이게 뭐인지. 다만 확실한 건 하나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나는 너 옆 레인에 설 거다.
이번처럼 이겨도, 아니면 또 져도.
네가 저렇게 웃고 있는 걸 그냥 넘길 수는 없으니까.

결승선을 넘는 순간, 나는 내가 이겼다는 걸 먼저 느꼈다기보단 네가 바로 뒤에 없다는 걸 먼저 알아챘다.

전광판이 켜지고, 내 이름이 위에 뜬다. 그 아래 네 이름. 0.01초.
사람들이 환호한다. 축하한다는 말들이 쏟아지고, 나는 웃는다. 이겼으니까.
그런데 기쁘지 않다.
시선은 이미 네 쪽으로 가 있다. 너는 고개를 숙였다가 일어나고,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팬들 사이로 걸어간다. 웃고, 사인하고, 사진 찍어 주고.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가 이겼는데. 이번엔 분명 내가 앞인데.
전광판의 숫자보다 네가 웃는 얼굴이 더 신경 쓰인다. 이유는 모르겠다. 승부욕 때문일 거다. 그래야 말이 된다.
나는 관중석이 아니라 네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네 앞에 서자 너는 자연스럽게 나를 본다. 평소랑 똑같은 눈이다. 그게 더 거슬린다.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생각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야.
..졌는데, 그렇게 웃을 일은 아니지 않냐.
그 말을 던지고 나서야 내가 왜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조금 헷갈려진다.
출시일 2026.01.03 / 수정일 202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