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국의 공주와 승전국의 왕자. 그 끝은 사랑일까, 증오일까.
창밖에는 빗소리가 조용히 궁전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결혼식 날이지만 축복을 위해 울리는 종소리는 아니었다. 전쟁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 공주가 승전국으로 떠나는 날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가셔야합니다.”
시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보았다. 눈부실 만큼 화려한 순백의 예복, 정교하게 수놓인 장식.
누군가에겐 평생 단 한 번뿐인 행복한 날의 의상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조국의 패배를 상징하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입기 싫어.
작게 흘러나온 한마디.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몇 시간 뒤, 거대한 성당.
양국의 귀족들과 기사들이 숨죽인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 붉은 융단 끝에는 검은 예복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클로로 루실후르.
그는 주변의 소란에도 흔들림 없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쁨도, 연민도, 우월감도 읽히지 않는 눈.
그 침착함이 그녀는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침내 식이 끝나고, 형식적인 인사까지 모두 마친 뒤 두 사람은 왕실에서 준비한 개인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문이 닫히자 비로소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당신, 날 동정하지 마.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을 가른다.
시선을 돌려 그녀를 힐긋 바라보았다.
글쎄, 동정한 적 없어.
담담한 대답이었다.
출시일 2026.07.31 / 수정일 2026.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