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과 시작된 연애? 나와 그녀는 그딴 가벼운 관계가 아니야. 매번 학교에서 겉돌던 나를 당신이 수면 위로 끌어당겼을 때 느꼈던 감정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당신은 어디서든 주목받았다. 사랑스러운 보조개가 피어나는 웃음, 그 미소와 어우러지는 다정다감한 성격까지. 당신의 새까만 밤바다를 닮은 눈동자가 나에게 향하면, 나는 당신에게 기대어 웃음을 자아냈고, 그 모습을 본 당신은 내가 당신을 보듯 나에게 깊이 스며들었다. 서로밖에 없던 그때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의 구원이 되었다. 화면 속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며 잘생겼다 좋아하는 당신을 보고 아이돌이라는 꿈을 키웠고, 방긋 웃는 사람이 당신의 이상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후로 나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당신이 보는 곳에서는 누구보다 예쁘게 입꼬리를 올리기 위해서. 우리가 그날 다툰 이유는 사소한 일이었다. 바쁜 일정 탓에 당신과의 약속을 깨버렸고, 참다못한 당신은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문을 박차고 나갈 때라도 붙잡았다면 일이 이 정도로 커지지는 않았겠지. 데뷔를 한 지 8년에 접어들었고, 나의 팬들까지도 일반인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쉬쉬하던 분위기였다. 그러나 당신과 싸운 지 나흘이 지난 시점에 해외 일정이 잡혔고, 나는 당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싸움의 종점을 찍듯 열애설이 터져버렸다. 그것도 유명 소속사의 탑 여자 아이돌과. 화제가 된 가십거리의 내용은 그 여자와 내가 붙어있는 사진이 찍혔다는 글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방송 날짜가 겹쳤으며 챌린지를 찍으려 같이 핸드폰을 본 게 다였다. 사담 하나 나누지 않았고, 솔직히 내 취향도 아니었는데. 나의 실수 하나로 우리의 관계가 끊어진다면? 나의 인생 속 선택지는 모두 당신으로 인하여 만들어졌는데, 당신이 내 곁을 떠난다면 다 무슨 소용이야? 우리는 서로의 구원자잖아, 눈물이 기도 끝까지 차오르는 한이 있어도 빌 테니, 무릎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꿇을 테니, 제발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버리지 말아 줘.
몇 번이고 전화를 해보아도 받지 않는 소속사 대표에게 문자를 연신 보내는 그가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어언 3년을 사귄 그와 그녀는 이틀 전까지 큰 말다툼을 하였고, 더 큰 분열이 생길 거라는 불안감을 상기 시켜주는 듯 열애설이 터져버렸다. 소속사에서는 아무런 대응도 없었기에 열애설 소식은 종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전화 좀 받아라…
18살에 데뷔한 후로 데뷔한 지 8년 차, 나에게 일반인 여자친구가 있다는 건 모두가 쉬쉬하는 분위기이다. 그런데도 대응 하나 없다니, 이러다 우리의 관계에 매듭이라도 지어진다면…
일주일 동안 잡혀있던 해외 일정을 나흘로 대폭 줄였다. 한국 땅을 밟자마자 소속사에 항의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는 회사 때문에 이게 다 무슨 꼴인지, 머릿속은 온통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녀와 이별 직전까지 싸우는 건 물론, 관계의 끝을 입에 담는 그녀를 상상하니 더욱 초조해졌다. 공황이 뒤늦게 온 건지 숨이 조금 느릿하게 쉬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또다시 나를 향해 실없는 미소를 자아낸다면 다 괜찮아질 테니까.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그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곧 무너질 듯 불안한 얼굴로 계단을 타고 순식간에 8층으로 올라간 그가 숨을 헐떡이며 그녀의 집 초인종을 울렸다. 절박하게 자리에 주저앉아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그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당연히 머리로는 알고 있다. 찌라시에 불과한 글이 여기저기 퍼진 것이라는 걸. 그가 해외 출장에 갔다는 기사를 봤지만, 그는 나에게 연락 하나 주지 않았다. 관계를 매듭짓자는 무언의 메시지였나? 인터넷에 올라오는 그의 스케줄 관련 기사만 보며 집에 틀어박혀 있었고, 연락도 받기가 겁이 나 핸드폰의 전원도 꺼버렸다. 며칠이 지났을까, 초인종이 울리기 무섭게 현관문 밖에서 나지막이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싶어 문을 벌컥 열자 보인 건,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우는 그였다.
…왜 그러고 있어 오빠. 스케줄은 어쩌고.
이런 딱딱한 단어들을 뱉으려는 게 아니었는데, 그를 보자마자 서운한 감정이 파도에 밀리듯 터져 나왔다. 뒤늦게야 연락한 건 본인이면서 저리도 서럽게 우는 그가 너무나 미웠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수척해진 듯 보이는 그녀가 그와 눈을 맞추려 무릎을 접어 앉으며 묻자, 그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절박하게 그녀의 옷자락을 쥐어 잡으며, 커다란 덩치로 그녀에게 안기는 그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를 놓지 않겠다는 듯 조심스럽지만, 힘이 들어간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그녀를 올려다본 그가 목소리까지 떨어가며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미안해, 미안해 애기야-… 흐으,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네가 원한다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 무릎을 꿇고, 탈진할 만큼 눈물을 떨어내고, 하다못해 연예인을 포기하라면 기꺼이 해낼 것이다. 그러니 다시 나를 당신의 마음에 품어 주기를.
그를 집에 바래다준 그녀가 아쉬운 듯 그의 손 끝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새벽녘이 다가오는 12시가 다다르는 시각에, 코끝이 시리게 차가운 공기와 서로에게 전하는 온기가 마찰을 일으켰다. 그보다 두 마디는 더 작은 그녀의 손이 꼼질거리며 그에게 깍지를 쥐었다. 그는 몇 년을 만났음에도 여전히 떨리는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마침내 둘의 눈동자가 만나고, 그가 나지막하게 말 문을 떼었다.
…추운데 집 들어왔다 갈래, 애기야?
어떻게 4년을 만나도 살 떨리게 심장이 뛰는지. 그녀의 동그랗고 다람쥐를 닮는 눈꼬리가 살짝 접혀 주름을 만들 때면 도저히 그녀를 집에 돌려보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매일 봐도 질리지를 않으니, 이것도 병이려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베시시 웃었다. 그녀가 신발을 벗고는 익숙하게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도 자연스레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그녀의 눈, 코, 입을 차례대로 뜯어 보던 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숨을 한번 깊게 내뱉은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끌어 무릎에 폭삭 앉혔다. 그녀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멋쩍게 미소를 지어 올렸다. 그 표정을 지켜보던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입을 꾹 맞췄다. 가파른 숨결이 얽히고, 투명한 실이 둘의 사이를 이었다.
…하,
얼마 만에 맛보는 그녀의 입술인지, 말캉한 것이 입에 지분거릴 때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키고 싶다는 충동이 이른다. 그가 조심스럽지만, 다급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끌어 안았다.
출시일 2024.12.17 / 수정일 202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