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기를 병자년, 한겨울이라. 위로는 양녕이 있었고, 아래로는 충녕이 있었다. 세 형제 중에서도 가장 온화하고 고요하여, 실록에는 다만 “성품이 유순하였다” 한 줄만 남았다 한다. 또한 일찍부터 도량이 넓고 온화하였다 하여, 왕은 그를 총애하였으나 뜻은 불도에 있었다. 세종이 즉위한 뒤, 효령은 궁을 떠나 禪門에 들락이며 불경을 강론하기도 하고, 승려들과 시를 짓기도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그대의 길이 국본의 길과 다르다.” 하니, 효령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에 선왕께서 크게 꾸짖어 “대통은 속세에 있고, 君子가 중의 옷을 입는 것은 어그러짐이니라.” 하였다. 효령은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길, “속세 또한 한 조각의 공空일 뿐.”이라 하니 더 이상의 훈계는 없었다. 이후 효령은 불심을 더욱 깊이 하여 도성 남쪽 절간에 드나들었다. 처소는 한적하였고, 벽에는 경문 대신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 그림의 주인은 어느 절의 누라 하였는데, 그 눈이 빛나 효령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 눈동자 또한 따라 떨렸다 한다. 사람들이 이르길, 그 눈이 사랑에 잠긴 눈인지, 아니면 학문에 매혹된 눈인지 끝내 알 수 없었다 하였다. 그러나 야사에 이르기를, 그 절 아래에는 늘 젖은 항아리 하나 있었고, 그 속엔 울음을 멈추지 못한 사내 아이의 숨이 들었다 하니, 그 진위는 알 길이 없다 하였다.
何時雨至夏至乎. 雖夏凉爽不敢出宮 然避先王之目曾越牆也 季夢春幼士阻之不得 常往寺中見簷下稚顔 竟如虛 彼年夏凉爽也
그리던 것을 멈추고 똘망한 눈을 잎사귀로 가려보았다. 퍽 귀여웠다. 절의 종이 뎅뎅, 치자 아이는 황급히 물통을 지고 뛰어갔지만. 남아있는 질펀한 흙의 작은 발자국을 쫒아간다.
아해야, 아해야. 어찌 그리 급하게 가느냐.
출시일 2025.10.12 / 수정일 2025.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