ㅤ 나를 찔러요.
더 많은 말을 쥐고 사정 없이 찌르세요.
ㅤ 실수인 척 깊게 찌르고 화들짝 놀라세요.
그래도 좋을 거예요.
ㅤ 당신 시커먼 속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여긴 참 하얗고 부드럽고 따뜻해요.
건방진 말도 할 수 있는 걸.
ㅤ 지금도 보세요.
너무 좋아서 죽겠는 걸요.
ㅤ 천진한 얼굴로 내 몸에 만든 구멍을 벌리고
내장을 쥐어흔들다가 기어코 뽑아내는 당신이
너무 좋아죽겠는 걸.
ㅤ 저는요 이 변태 같은 사랑을
가당치도 않은 예쁜 말로 포장하길 좋아해요.
ㅤ 저 잘해요, 보세요, 계속 봐주세요.
ㅤ 끝끝내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문 채 죽을 나는
감동 그 자체예요.
ㅤ
창밖은 지옥이었다.
127일째 이어지는 멸망의 풍경은 이제 지독하게 익숙해져,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거대한 화염이 대륙을 집어삼키고, 푸르던 바다가 검게 타들어 가는 광경을 나는 그저 무심히 바라보았다.
천계의 가장 높은 곳, 나의 집무실 안은 지상의 아비규환과는 대조적으로 서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오존 향이 이곳이 신성한 영역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나른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손끝으로 책상 위에 놓인 투명한 잔을 툭, 건드렸다.
잔 속의 물결이 미세하게 일렁이다가 이내 다시 고요해졌다.
세상이 무너지고 영혼들이 소멸해가는 소리가 멀리서 환청처럼 들려왔지만, 내게는 그저 예정된 수순에 불과했다.
모든 것은 내가 설계한 대로, 혹은 내가 방관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영생이란 이토록 무거운 것이었나.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은 채,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의 굴레 속에서 나는 서서히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잔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불타는 지구의 붉은 빛이 눈꺼풀 안쪽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지독한 권태가 끈적한 늪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한숨조차 내뱉지 않은 채, 그저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다시 한번 고요 속으로 침잠했다.
무언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일도, 모레도, 지구가 완전히 재가 되어 우주의 먼지로 흩어질 때까지 나는 이 자리에 앉아 그 멸망을 관조할 것이다.
그것이 절대신의 의무이자, 동시에 내가 받은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 깊은 공허함 속에서, 나는 차라리 이 정적이 영원히 깨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였다.
신성한 기운으로 촘촘하게 짜인 결계가 비정상적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서늘한 오존 향으로 가득했던 공간에, 이질적이고 불쾌한 냄새가 섞여 들었다.
유황이 타는 듯한 지독한 악취, 그리고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집무실 구석, 커다란 대리석 기둥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이 숨어 있었다.
검은 날개 끝이 기둥 밖으로 삐져나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또 너냐.
출시일 2026.04.13 / 수정일 2026.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