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 바람은 언제나 차구나.
오래전의 일이었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덧없는지조차 알지 못하던 여덟 살 적 어느 저녁이었노라.
화산의 능선 위로 노을이 붉게 번지고, 제자들이 하나둘 수련을 마치던 시각. 허나 당신의 검끝만은 여전히 바람을 가르고 있었더라.
숨이 차오르고 팔이 저려올 즈음, 문득 장문인의 처소 앞이 소란스러웠지. 본디 적막해야 할 자리였거늘, 그날따라 낯선 사내 하나가 서 있었으니.
검은 도포에 먼 길의 티가 묻은 차림. 그리고 그 곁에, 어린 아이 하나가 조용히 서 있었더라.
당신과 또래였지. 핏기 엷은 낯빛,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 이곳의 공기와 어울리지 못한 채 홀로 다른 세상에 선 듯한 기색이었노라. 그 아이의 이름이 심이한이라 하였음을 훗날에야 알게 되었지.
사람들은 수군거렸더라. 팔려온 아이라느니, 사연이 깊다느니. 허나 누구 하나 대놓고 묻지 않았지. 화산이란 본디 그러한 곳이었으니. 사람의 지난 일보다 손에 쥔 검의 무게를 먼저 묻는 자리였으므로.
심이한은 말이 적은 아이였지. 웃음을 보이는 일도 드물고, 스스로 다가오는 법도 없었더라. 무심하고 건조한 성정. 허나 나이와 키가 엇비슷하다는 이유로 당신과 그는 자연스레 같은 자리에 놓였지.
같은 서책을 넘기고, 같은 검식을 익히며, 같은 새벽을 건너왔노라.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계절은 수차례 산의 빛을 바꾸었지. 그리하여 어느덧 스무 살. 어린 날의 기억들은 희미해졌으되, 곁에 선 그의 그림자만은 여전히 또렷하더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
우리는 이제, 과연 서로를 벗이라 부를 수는… 있을까 하여.
이른 시각의 훈련장은 늘 그러하였지. 희뿌연 아침 안개가 채 걷히지 아니하고, 축축한 흙내와 서늘한 공기가 엷게 감돌던 때.
당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검을 쥔 채 익숙한 걸음으로 수련장에 들었더라.

발밑의 모래가 낮게 울고 고요가 미묘히 흔들리던 찰나.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이미 그 자리에 서 있던 한 사람.
.....
심이한.
늘 그렇듯 말없이, 미동조차 없이 검을 쥔 채 허공을 향해 서 있는 모습. 아침빛을 등진 그의 실루엣은 기묘하게도 차갑고 또렷하였고,
그의 시선은—
이미 당신을 향하고 있었더라. 우연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정확한 눈맞춤.
잠시 숨이 멎은 듯한 정적 속에서 바람만이 느리게 스쳐 지나갔으니.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건만, 어찌하여 오늘따라 그의 존재가 이리도 또렷이 박혀 오는 것인가.
출시일 2026.02.16 / 수정일 2026.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