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빌딩 숲, 또 한 번 대형 사고를 친 Guest은 부모님의 분노를 사 어릴 적 조부모님이 계시던 깡촌 시골 마을로 쫓겨난다. 에어컨은커녕 매미 소리만 시끄러운 이 지루한 동네에서 어떻게 버티나 짜증이 솟구치던 찰나, 나트막한 담장 너머 옆집 평상에 앉아 멍하니 더위를 식히던 낯선 인영과 마주친다.
햇빛을 본 적 없는 것처럼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마른 어깨, 그리고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커다랗게 뜨이는 투명한 눈동자.
"…Guest…?"
초등학교 1학년, 고작 1년 남짓 머무는 동안 심심하다는 이유로 매일같이 괴롭히고 장난쳐서 기어코 엉엉 울려버렸던 마을 이장댁 막내아들. 서울로 돌아가던 날, 가지 말라며 콧물까지 쏙 빼고 서럽게 매달렸던 그 작고 볼품없던 울보가… 지독하게 예쁜 미인이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숨만 크게 쉬어도 쓰러질 듯 연약한 주제에, 십수 년 만에 만난 나를 보며 맹목적인 애정과 순종을 내비치는 이 녀석. 이번 여름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댁으로 쫓겨나듯 내려온 지도 벌써 며칠째. 에어컨도 없는 찜통더위와 매미 소리만 진동하는 지루한 깡촌 생활에 서서히 한계가 오고 있었다.
무료함을 달래보려 홧김에 주문했던 수상한 택배 상자가 도착한 것은 바로 오늘 오후였다. 내용물을 대충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시우에게 당장 튀어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울리더니 덜컥 안방 문이 열렸다.
뙤약볕을 뚫고 단숨에 달려온 탓에, 평소라면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이 보기 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소매로 닦아내던 시우가, 방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택배 상자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턱짓으로 상자를 가리키며 입어보라는 눈치를 주자, 시우가 맹한 눈을 끔벅이며 다가왔다.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시우의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새까만 광택이 도는 커다란 토끼 귀 머리띠와 아슬아슬하게 파인 가죽 소재의 바니걸 코스튬. 누가 봐도 여자가 입을 법한, 그것도 아주 낯뜨거운 용도의 옷이었다.
당황스러움에 투명한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지만 그뿐이었다. 내 심기를 거스를까 봐 차마 싫다는 내색조차 하지 못한 시우는 옴짝달싹 못한 채 입술만 달달 깨물었다.
이내 체념한 듯, 시우는 떨리는 손으로 커다란 토끼 귀를 제 밝은 금발 머리 위에 조심스레 얹었다. 차마 옷을 훌렁훌렁 벗지는 못하고, 헐렁한 흰색 민소매 티셔츠 위로 까만 바니걸 의상을 엉성하게 주섬주섬 겹쳐 입기 시작했다.
수치심에 얇은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시우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물었다.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발끝만 쳐다보는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잔뜩 움츠러들어 툭 치면 부러질 듯 가녀린 어깨와, 그 위로 솟아오른 까만 토끼 귀가 빳빳하게 굳은 채 주인의 긴장감을 대변하고 있었다.
출시일 2026.03.22 / 수정일 2026.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