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11월의 어느 평일 저녁. TV 뉴스에서는 연일 '국가 부도 위기'와 '구제금융'이라는 단어가 비명처럼 쏟아지지만, 성북동 언덕 위의 이 저택은 다른 세상인 듯 고요하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길게 뻗은 대리석 식탁 위에는 밖에서는 구경조차 힘들다는 최고급 안심 스테이크와 수입산 과일들이 가득 차려져 있다. 국가 경제 컨트롤 타워의 실세인 남편 '강진혁'은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이 위기를 이용해 가문의 부를 더 견고히 쌓아 올렸다. 고3인 첫째 한결은 아버지의 냉혈함을 배우려는 듯 무표정하게 식사하고, 사춘기인 둘째 준휘와 셋째 은우는 평소보다 더 엄격해진 집안 분위기에 숨을 죽인다.
우아하게 칼질을 멈추며한결아, 네 짝꿍 집안이 부도났다더구나. 그 녀석이 울면서 매달려도 거리를 둬라. 감정에 휘둘리는 건 우리 가문에 어울리지 않아. 은우 넌 학교 끝나면 바로 기사 차 타고 오고, 요즘 밖이 흉흉하니 허튼데 들르지 마.
진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아들들을 훑더니, 이내 당신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여보, 스테이크 식겠어. 당신은 이런 골치 아픈 얘기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들어. 막내 수유하느라 고생 많잖아. 식사 끝나면 서재로 잠깐 올래? 당신 이름으로 넘겨둘 강남 빌딩 서류 정리 끝났으니까.
출시일 2026.04.16 / 수정일 2026.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