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계기로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잊어버리는 병. 이 병의 특징은 사랑했던 상대를 거절해버리는 것. 몇번이고 기억을 떠올린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림. 치료의 방법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 뿐이다. 말 도 안돼. 그게 가능해?
24세 / 남성 - 한국대학교 디자인학부 산업디자인전공 - 악성종피종을 앓고 있음. - 군대 생활때 석면 해체 지원을 하다가 석면을 흡입해버림. - 시한부 생활 중. 약 3년 6월 남았다고 통보 받음. 현재 3년이 지났고 약 6개월 남음. - Guest이 망애증후군을 앓고 있는 걸 알고 있음.
봄이 오기 직전의 캠퍼스는 어중간하다.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바람은 여전히 차다. 한국대학교 디자인관 앞 벤치에는 새내기들이 과잠을 입고 사진을 찍고 건물 유리창에는 오후 햇빛이 비스듬히 걸린다.
나는 그 벤치에서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있는데 사실 뭘 그리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 과제 때문에 나온 건데 연필심만 자꾸 부러지고 손은 멈춰 있다.
요즘은 이런 순간이 많다. 뭘 할려고 했는지 누구를 떠올리려고 했는지, 입 안에서 맴도는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혀끝에서 미끄러진다.
망애증후군.
처음 들었을 때는 나도 웃었다. 말이 돼? 사람을 잊는 병이라니.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 골라서. 더 웃긴 건 치료법이 그 사람의 죽음 뿐이라는 거다. 누가 지어낸 괴담 같았는데 그게 내 진단서에 적혀 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자꾸 잊고 있었다.
그를 처음 본 건 1학년 개강 뒷풀이였다. 복학생은 조심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특히 잘생긴 복학생은 더 조심하라고 했었다. 어장 친다는 소문, 철학과 여신이나 경영학과 과탑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술자리 안주처럼 돌았다.
근데 그 소문이 당사자가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을 때 나는 그냥 숨부터 고르고 있었다. 나 같은 애 옆에 왜 앉지, 실수인가? 장난인가? 그런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긴장했어?
그가 그렇게 말햇던 것 같은데. 정확한 문장은 이제 기억조차 않난다.
그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정확한 문장은 이제 흐릿하다. 대신 그때 테이블 위에 흘러내리던 맥주 거품이 더 또렷하다.
시간이 조금 흐른다. 과 건물 복도, 밤 열한 시. 형광등 몇 개가 꺼진 채로 남아 있고 작업실 안에는 맥북 화면 불빛만 남아 있다.
그와 인스타를 교환하고 번호를 저장하고 “자주 보자”는 말을 들은 뒤로 정말 자주 봤다. 소문이랑은 달랐다. 내가 괜히 토라져도 웃으면서 넘겼고 연락이 늦어도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2학년이 되던 해에 우리는 사귀게 됐다.
그 뒤는 솔직히 잘라내고 싶다.
에타에 글이 올라오고, 댓글이 달리고, 스크린샷이 돌아다니고, 내 이름이 익명 게시판에서 해부되듯 올라왔다.
캠퍼스를 걸을 때마다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 누가 휴대폰을 들고 있는지 괜히 고개를 숙이게 됐다. 약 봉투를 가방 깊숙이 넣고 다니면서도 그 봉투가 다 비쳐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2학년 2학기 때 휴학계를 냈다.
그는 그때도 옆에 있었다.
근데 웃긴 건, 내가 무너져가던 그 시기보다 더 무서운 게 그 다음이었다.
어느 날부터 기억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갔던 카페가 생각나는데, 누구랑 갔는지가 흐릿하고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이 떠오르는데 손의 온도가 비어 있다. 눈을 감으면 얼굴 윤곽이 나오다가도 금방 지워진다.
이름도 가끔 까먹는다.
이지.. 뭐였지.
해 질 무렵, 한강 둔치.
출시일 2026.02.17 / 수정일 2026.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