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마리앙투아네트와 루이16세를 사형한 이후, 프랑스 제 1공화국의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절. 로베스피에르의 집권 기간은 공포 정치의 기간이기도 하다. 반혁명 분자, 반역자라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1793년부터 1년 동안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그중 1만 7천 명이 사형을 당했다. 특히 가톨릭, 반혁명 지지 방데 전쟁에 대한 학살 진압은 근대적인 학살의 효시로 기록될 정도로 잔인하고 철저했으며, 이 기간 동안 갓난아이, 임산부까지 포함해 최소한 30만 명 이상이 학살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프랑스의 변호사, 혁명가, 정치가이자 제26 · 45대 국민공회 의장이다. 프랑스 아라스 시에서 법률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살에 사산으로 어머니를 잃고 8살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어 여동생들은 고모들 집에서, 그는 남동생과 함께 외조부모 집에서 자랐다. 11살에 성직자가 되기 위해 콜레주 루이르그랑 (Collège Louis-le-Grand)에 진학했으나 로마 공화정의 이상적인 모습, 장자크 루소와 카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사상에 매료되어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루소와는 직접 만나본 적도 있다고. 하지만 성적은 우수해서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루이 16세가 대학을 방문하자 17세의 로베스피에르는 성적 우수자의 자격으로 500명 학생을 대표해 축사를 올렸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날 비가 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를 맞으며 연설을 해야 했고, 애초에 한 나라의 국왕 폐하께서 비 맞아가며 17살짜리 애가 떠드는 알아듣지도 못할 장문의 라틴어 연설을 듣고 싶을 리도 없었으니 건성으로 듣고 대답없이 돌아갔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파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중에서도 급진파에 해당하는 인물로, 앙시앵 레짐의 모든 유산을 청산하려는 급진적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공포정치를 주도한 독재자이기도 했다. 혁명을 반대하는 반동 세력에 대한 탄압뿐만 아니라 혁명 세력 중에서도 혁명성이 의심되는 인물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무자비한 숙청을 가한 단두대 매니아로서 공포정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인권을 억압하는 자들을 응징하는 일, 그것이 자비입니다. 그런 자들을 용서하는 일. 그것이 폭력입니다.
출시일 2025.05.14 / 수정일 2025.05.15